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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결혼식 버스 한희철 얘기마을(159) 결혼식 버스 단강이 고향인 한 청년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전화를 주기도 하는 가족인데다, 애써 주일을 피해 평일에 하는 결혼식인지라 같이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대절한 관광버스가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잔치가 있는 날에는 의례히 대절하는 버스입니다. 한번 부르는 값이 상당하면서도 버스 대절은 잔치를 위해선 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쁜 농사철, 게다가 애타게 기다렸던 단비마저 내려 버스엔 전에 없던 빈자리도 생겼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차 안의 스피커에선 신나는 음악이 쏟아지듯 흘러나옵니다. 그 빠르기와 음 높이가 여간이 아닙니다.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이 바쁜 철 잔치를 벌여 미안하고.. 2020. 11. 30.
막연함 한희철 얘기마을(158) 막연함 귀래로 나가는 길, 길 옆 논둑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군데군데 거름 태운 자국이 버짐처럼, 기계충처럼, 헌데처럼 남아있는, 풀 수북이 자라 오른 논 한 귀퉁이, 처박듯 경운기 세워두고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 퍼지는 담배 연기 따라 함께 퍼지는, 왠지 모를 안개 같은 막연함. - (1992년) 2020. 11. 29.
사라진 참새 한희철 얘기마을(157) 사라진 참새 교회로 들어오는 입구 양쪽으로는 향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향나무는 참새들의 놀이터다. 바로 앞에 있는 방앗간에서 놀던 참새들이 쪼르르 날아와 향나무 속에서 뭐라 뭐라 쉴 새 없이 지껄여대곤 한다. 다투는 건지 사랑고백을 하는 건지. 서재에 앉으면 그런 참새들의 지저귐과 푸릅 푸릅 대는 힘찬 날갯짓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게 된다. 그런 참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정겨운지. 며칠 전엔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땅거미가 깔려드는 저녁 무렵이었다. 예배당 마당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 새 한 마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와, 훅 향나무 속을 훑으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참새들의 비명소리도 잠깐, 순간적으로 향나무를 빠져 날아간 검은 새의 발톱엔 어느새 .. 2020. 11. 28.
할아버지의 눈물 한희철 얘기마을(156) 할아버지의 눈물 정작 모를 심던 날 할아버지는 잔 수 모르는 낮술을 드시곤 안방에 누워버렸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달랠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를 심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공공연히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심는 날을 일요일로 잡았고, 흔해진 기계모를 마다하고 손모를 택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일곱 자식들이 며느리며, 사위며, 손주들을 데리고 한날 모를 내러 내려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 노인네만 사는 것이 늘 적적하고 심심했는데 모내기를 이유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됐으니 그 기쁨이 웬만하고 그 기다림이 여간 했겠습니까. 기계 빌려 쑥쑥 모 잘 내는 이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논둑을 고치고 모심기 알맞게 물을 가둬놓고선 느.. 2020. 11. 27.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한희철 얘기마을(155)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약주만 들면 교회에 들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꼬부랑 할아버지입니다. “내가 슬퍼.” 마음 아픈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하기도 하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 하며,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나를 향한 호칭도 전도사님에서부터 목사님, 약주가 과한 날은 조카, 때론 자네가 되기도 합니다. “난 자네가 좋아. 아들 같어.” 평소엔 일마치고 돌아올 무렵 주머니 가득 달래를 캐가지곤 “이런 거 어디 나는지 모를 것 같아 캐 왔다.”시며 건네주곤 하는데, 약주를 하시면 약주 기운에 “난 자네가 좋다.”고 그 어려운 사랑고백 술기운에 기대 하듯 거듭거듭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날 좋아한다는 고백이 누구로부턴들 반갑지 않겠습니까만 한 할.. 2020. 11. 26.
남모르는 걱정 한희철 얘기마을(154) 남모르는 걱정 종하가 산토끼를 또 한 마리 잡았습니다. 올 겨울 벌써 일곱 마리째입니다. 토끼를 잡아들이는 종하를 종하 할머니는 걱정스레 봅니다.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종하 아버지도 산짐승 잡는 덴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하 아버지가 마흔도 못 채우고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아버질 닮아 토끼 잘 잡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종하를 신기한 듯 말하지만 할머니, 종하 할머니는 남모르는 걱정을 혼자 합니다. - (1992년) 2020. 11. 25.
장마 인사 한희철 얘기마을(153) 장마 인사 지난밤엔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습니다.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습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갈랐습니다. 파르르 번개가 떨면 창가까지 자라 오른 해바라기 이파리는 물론 논가 전기줄까지도 선명했고, 그 뒤를 이어서 하늘이 무너져라 천둥이 천지를 울려댔습니다. 신난 빗줄기도 맘껏 굵어져 천둥과 번개가 갈라놓은 하늘 틈을 따라 쏟아 붓듯 어지러웠습니다. “다들 휴거 됐는데 우리만 남은 거 아니야?”는 아내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을 만큼 두렵기까지 한 밤이었습니다. 때마침 정전, 흔들리는 촛불 아래 밀린 편지를 쓰다 쫓기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작실로 올랐습니다. 늦은 밤의 기도가 없진 않았지만 무섭게 내린 비, 언덕배기 광철 씨네며 혼자.. 2020. 11. 24.
고추 자루 한희철 얘기마을(152) 고추 자루 망치 자루처럼, 마른 몸매의 지 집사님이 한 자루 고추를 이고 간다. 부론장에 고추를 팔러가는 길이다. 며칠 전엔 여주장까지 가 고추를 팔고 왔다.스물일곱 근, 아귀가 터지도록 고추 자루 묶어 맸지만 한번 팔고 와 몇 집 잔치 부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곶감고치에서 곶감 빼먹듯 한 자루 한 자루 줄어드는 고추들.버스 운전사 눈치를 보며 지 집사님이 고추 자루를 싣는다. - (1992년) 2020. 11. 23.
넉넉한 사랑 한희철 얘기마을(151) 넉넉한 사랑 근 한 달 동안 훈련을 하느라 고생한 군인들을 위해 떡이라도 조금 해서 전하면 좋겠다는 말을 모두가 좋게 받았습니다. 맘씨 좋은 형님 같은 인상의 대대장도 교인이고 하니 부대선교를 위해서도 좋을 듯싶었습니다. 교회 형편이 형편인지라 방앗간에서 서너 말 쌀을 사서 떡을 만들어야지 싶었는데, 잠깐 기다려보라 한 교우들이 어느새 서로들 쌀을 모았습니다. 한 말 두 말 늘어난 쌀이 제법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마을 몇 분도 쌀을 보태 어느새 모은 쌀이 한 가마에 이르렀습니다. 기꺼운 참여, 군에 간 아들 둔 부모도 있고, 군인들 바라보는 마음이 다 내 자식 같아 쌀을 모으는 마음들이 기꺼웠습니다. 서둘러 방아를 돌리고 뜨끈한 절편을 만들어 전했습니다. 한 가마나 되는 떡.. 2020.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