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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2

화두(話頭), 모르는 길 신동숙의 글밭(256) 화두(話頭), 모르는 길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가을 바람이 날 부르는 것으로 알고 나선 길입니다. 가을 바람에 날리우는 풀씨 한 알 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에 닿을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모르는 길을 나섭니다. 애초에 알고자 나선 길이 아니라 머릿 속에 가득한 앎과 안다는 생각 조차도 비우고자 나선 길이기에, 습관적으로 머리가 헤아리려 드는 하나 둘 셋 숫자도 잊고서 엎드립니다. 단지 깨어서 알아차림으로 날숨마다 좌복에 몸을 엎드리다 보면 비워질까. 날숨마다 입 속에서 모른다고 시인하면 지워질까.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사라질까. 어디까지가 텅 비운 곳인지. 어디쯤이 나를 잊은 곳인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매 순간을 깨어서, 지금 이 순간으로 이 땅으.. 2020. 10. 20.
고독의 방 신동숙의 글밭(255) 고독의 방 가슴으로 쓸쓸한 바람이 불어옵니다못 견디게 시리도록 때론 아프도록 바로 이때가 고독의 방이 부르는영혼의 신호 사람을 찾지 않고 홀로 침잠하는 날숨마다 날 지우며시공간(時空間)을 잊은 無의 춤 처음엔 온통 어둠이었고 언제나 냉냉하던 골방입니다 홀로 우두커니 선 듯 앉은 듯 추위에 떨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반짝이는 한 점 별빛그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 먼 별이 살풋 짓는 여린 미소에 가슴 속 얼음이 녹아 눈물로 흐르면 흘러가기를 목마른 곳으로 골방에 나보다 먼저 다녀간 이가 있었는지아궁이에 군불이라도 지폈는지 훈훈한 온기가 감돕니다 문득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아.. 이제는 고독의 방으로 드는 일이 견딜만합니다 고요히 머무는 평온한 침묵의 방.. 2020. 10. 16.
풀어주세요 신동숙의 글밭(254) 풀어주세요 천장의 눈부신 조명 위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틀 너머로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멘트 바닥 아래 흙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벽돌 우리에 갇혀 매여 있는 나를 풀어주세요 안락이라는 족쇄에 묶여 꼼짝 못하는천국이라는 재갈을 입에 물고 말 못하는 몸 속에 갇힌 나를 풀어주세요 2020. 10. 15.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신동숙의 글밭(255)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사과를 처음으로 스스로 깎아 먹었던 최초의 기억은 일곱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녁 무렵 작고 여린 두 손으로 무거운 사과를 거의 품에 안다시피 받쳐 들고서, 언덕처럼 세운 양무릎을 지지대 삼아, 오른손엔 과도를 들고 살살살 돌려가며 한참을 씨름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한참을 사과와 과일칼과 씨름하며 그리고 엉성하게나마 다 해내기까지 앞에 앉아 숨죽이고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시며 박수를 쳐주었던 기억이다. 그때부터 스스로 사과를 깎아먹는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감의 문제도 그때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겁나는 과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칼끝이 함께 둘러앉은 누군가에게.. 2020. 10. 14.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신동숙의 글밭(254)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 가을 하늘이 참 좋아서, 이 아름다운 하늘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한 마음이 산들바람처럼 불어옵니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 만큼이나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펼쳐지는 내면의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한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는 가을 아침입니다. 구름처럼 자욱한 욕심을 걷어낸 텅빈 하늘, 무심한 듯한 공空의 얼굴은 어쩌면 사랑뿐인 하나님의 얼굴을 닮았는지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푸른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실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 만큼 땅 만큼입니다. 그처럼 맑갛게 갠 내면의 .. 2020. 10. 13.
달개비 신동숙의 글밭(253) 달개비 인파人波에 떠밀려 오르내리느라 바닷가 달개비가 들려주는 경전經典을 한 줄도 못 읽고 말 한마디 못 붙이고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답니다 2020. 10. 12.
알고 보면 신동숙의 글밭(252) 알고 보면 허리 굽혀 폐지 주우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알고 보면 어느 독립운동가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더욱 허리 굽혀 인사드려야겠다 2020. 10. 11.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신동숙의 글밭(251)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가을날 산길을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떨어진 잎 사이로도토리 알밤이 반질반질 땅바닥을 보며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누군가 집안에 뒹구는 종이 조각들 차곡차곡 하늘을 보며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누군가 까맣게 태우는 밤별들을 흩어 놓으신 2020. 10. 10.
환승 신동숙의 글밭(250) 환승 친정 엄마가 아침 햇살처럼 들어오시더니 가방도 안 내려놓으시고서서 물 한 잔 드시고 "이제 가야지" 하신다무슨 일이시냐며 불러 세우니 "버스 환승했다" 하시며떠날 채비라 할 것도 없이 부지런히 걸어도 10분이 넘는 거리를저녁 햇살처럼 걸어가신다 2020.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