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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9

도(道)는 ‘평범하고 밝다’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7) 도(道)는 ‘평범하고 밝다’ - 전집 3권 『성서 개요』 「열왕기하」 편 - 오시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강단에 올라가 보니 ‘계시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청중 가운데 앉아 계신 특강을 편히 여길까. 늘 사적 공간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만 지내왔던 사이였는데, 하필 작은어머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초대된 까닭에 일정이 ‘노출’되어 버렸다. 어쩌랴. 애정표현이신 것을... 심호흡을 하고 그냥 준비한 대로 강의를 진행했다. “여러분은 사람을 둘로 나누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누시겠어요?” 서로 첫 대면, 청중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내가 던진 질문에 재미있는 이분법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남자와 여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갑과.. 2015. 7. 20.
여호와를 아는 사람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6) 여호와를 아는 사람 - 전집 3권 『성서 개요』 「사무엘상」 편 - 어디나 높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무기가 된다. 사소한 일상의 일부터 죽고 사는 크고 긴급한 일까지, ‘내가 높은 사람을 안다’는 것은 더 쉽게, 더 빠르게, 나아가 나에게 더 유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힘이 된다. 최근 어이없게 방역망이 뚫려 안타까운 생명들을 잃고 전 국민을 떨게 했던 ‘메르스 사태’만 보아도 그렇다. 1번 환자(그나저나 사람에게 1번이 뭐냐? 인격체를 호칭하는 방식으로는 참 별로다.) 스스로 ‘메르스 같다’고 자진신고 했다는데, 안이한 탁상행정에 콧방귀로도 안 듣던 보건당국 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안다’는 환자의 ‘협박’(?)에 움직였고, 덕분에 더 끔찍하게 확산.. 2015. 7. 9.
단순, 용감한 신앙의 선택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4) 단순, 용감한 신앙의 선택- 전집 3권 『성서 개요』 다니엘 편 - 오랜만에 만나 나의 근황을 묻는 지인의 말에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전업주부 7년 차에 기적 같이 선 강단이지만 학생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다고. 처음엔 욕심내지 않고 아이도 어리니 한 과목만, 그러다 두 과목이 되고, 고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연구교수도 되고…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게 자연스런 수순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아, 이렇게 ‘승진’해가는 거구나! 열심히 살면,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전문성을 채워나가면, 아이의 눈을 맞추고 존재의 요구에 반응하느라 잠시 멈추었던 걸음이라도 차근차근 다시 내 꿈을 이루어갈 수 있구나. 직업안정성도 더불어 성취할 수 있는 거구나. 그런데 .. 2015. 6. 22.
모남과 눈물, 신앙의 회오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3) 모남과 눈물, 신앙의 회오리 - 전집 3권 『성서 개요』 예레미야 편 - 성서 어느 인물인들 소중히 여기고 경외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을까마는, 김교신은 특히나 예레미야를 좋아하고 아꼈다. 그의 소박한 서재에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김교신은 성서 묵상과 주석 연구를 하는 와중에 예레미야의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저이만큼의 치열함과 진지함과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생각에 미치면 글을 쓰다가도 성서본문을 다시 한 번 더 읽고 공부하게 된단다. 김교신은 예레미야가 가진 ‘모순적 성격’(?)에 매료되었다. 날카롭게 각진 모서리처럼 살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여리고 감성 풍부한 ‘눈물의 선지자’가 예레미야라고 평가한다. 무엇보다 예레미야는 “모나게.. 2015. 6. 14.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2)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 -「우치무라 간조론에 답하여」 1930년 - 흔히들 김교신의 스승이 ‘우치무라’라고 한다. 그 호명에 김교신도 깜짝 놀랐다. 물론 그가 우치무라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석한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실린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글에서 ‘조선인 제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김교신은 기회를 빌어 자신이 우치무라를 어찌 생각하는지, 그로부터는 무엇을 배웠는지를 밝힌다. 김교신이 처음 기독교 복음을 접한 것은 1920년 4월 16일 동경 시 거리를 지나던 저녁 무렵이었다. 당시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 재학 중이던 한 청년의 설교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하여 이틀 뒤 주일에 근처 교회를.. 2015. 6. 7.
생명의 법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1) 생명의 법칙 - 「농사잡기」, 1934년 9월 -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루하루 바삐 뛰며 지내다보니 먹거리로 받은 고구마 한 무더기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있다가 버려지려고 열매로 영근 생명이 아닐 텐데, 어느 날 문득 대청소 중에 발견하고 살펴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건조한 날씨에 빼빼 물기 마른 모습으로, 도려내어 먹기에는 고구마 싹들이 군데군데 너무나 많이 나와 있었다. 빠르게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 그냥 버려? 자칫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할 뻔한 고구마 열 덩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얼른 베란다 한 귀퉁이 큰 바구니에 담고 물을 부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 하루씩 살아내느라 그 일조차 잊고 지내기를 열흘 쯤.. 2015. 5. 31.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0)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 「공포의 심리」 1940년 8월 - 일제치하 어느 순간인들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겠는가. 허나, 1940년이 접어든 시점은 김교신 스스로도 ‘이 곤란한 시대’라고 명명할 만큼 반(反)생명적 식민주의의 힘이 폭력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던 당시였다. 약 12년을 몸담고 있었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한 것이 1940년 봄(3월 22일)이었고, 같은 해 9월에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1941년 10월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할 때까지 또다시 수개월 교사생활을 쉬었고, 결국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된 것이 1942년 3월이니, 나라도 나라이거니와 ‘교직을 천직’으로 여.. 2015. 5. 24.
선한 싸움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9) 선한 싸움 -『대립항쟁의 대상』, 1936년 11월 -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의 화법을 놓고 말들이 많다. ‘주어’가 없어서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지, 누가 그리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무책임한 화법이라는 비판은 예전부터 회자되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과 정책을 놓고 대한민국 최고 의사결정자가 했다는 말들을 듣거나 읽어보면 나도 당황스럽다. 무슨 말인가? 마치 주관식 문제를 받고 답안은 써야겠는데 아는 건 별로 없고 문제가 이해조차 안 되어 급한 마음에 수업 시간에 들은 단어들을 의미 없이 쭉 나열한 학생의 중간고사 답안지를 읽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 2015. 5. 17.
이 돌들로도…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8) 이 돌들로도… - 1935. 12 -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런 거지 싶다. 수년 째 교회 공동체 밖으로까지 불거져 나와 망신살이 이만저만이 아닌 목회자들의 비윤리적, 탐욕적 행태들 말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다고, 무소부재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보시는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어찌 목사사무실 문 닫아 걸고 여신도들을 농락하며, 어찌 이말 저말 말을 바꾸어가며 거짓과 허세로 강단을 채우며, 어찌 고아와 과부의 헌금을 가져다가 제 식구들 배불리는 데에 쓸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 2015.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