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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9

시간이라는 약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5) 시간이라는 약 정릉교회 목양실은 별관 2층에 있는데, 창문에 서서 바라보면 바로 앞으로는 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겨우 자동차 교행이 가능한 길 세 개가 서로 만난다. 여러 번 때운 자국이 남아 있는 도로에는 부황을 뜬 자국처럼 맨홀 뚜껑들이 있고, 대추나무에 연줄 걸린 듯 전선이 어지럽게 묶인 전봇대 여러 개, 자동차보다도 애인 만나러 가는 젊은이가 걸음을 멈춰 얼굴을 바라보는 반사경 등이 뒤섞인 삼거리엔 늘 차와 사람들이 오고간다. 삼거리라 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개의 길이다.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길까지 합하면 사거리가 되는 셈이어서 열십자 모양을 하고 있다. 정릉에는 유난히 언덕이 많고 골목길이 많은데 예배당 앞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복잡한 길 주변.. 2019. 9. 10.
저만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4) 저만치 우연히 소월의 시 ‘산유화’를 대하는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험에 나왔던 문제가 있다. 당시 시험문제의 예문으로 주어진 시가 소월의 ‘산유화’였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라는 시에서 소월과 두보의 시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아서 쓰고, 그 이유를 쓰라는 문제였다. 문제를 대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한국과 중국을 대표할 만한 두 시인의 시 세계를 어찌 단어 하나로 찾아내라는 것일까, 그런 일이 가당한 일일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답은.. 2019. 9. 10.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태풍 링링의 위력이 대단하다. 귀엽다 싶은 이름을 두고 어찌 저리도 당차고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지. 하긴, 세상에는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들이 많은 법이니까.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땅 이 계절, 너무 심하게 할퀴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 싶다. 보통 바람이 아닐 것이라 하여 예배당 입구의 화분도 바람을 덜 타는 곳으로 미리 옮겨두었는데, 때가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람이 상륙작전을 하는 것 같다. 비의 양은 적지만 불어대는 바람은 실로 대단하여 이런 날카롭고도 묵중한 바람의 소리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지 싶다. 동화 ‘소리새’를 쓰며 썼던, 잘 되지 않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 2019. 9. 7.
당구를 통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3) 당구를 통해 여러 종목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몇 몇 종목들은 즐기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젬병인 종목이 있다. 당구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당구는 젊은이들의 해방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구를 피했다. 몇 몇 친구들과 우리라도 그러지 말자고 하며 피했던 것 중의 하나가 당구장 출입이었다. 그런 뒤로도 당구를 접할 일이 없어 당구의 룰도 잘 모르고, 큐대를 어찌 잡는지도 잘 모른다. 한국의 당구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전국에 있는 당구장 수가 2만 2630개(2017년 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많고, 하루 이용자만 160만 명으로 추산이 된단다. 요즘은 당구를 TV로 중계하는 일도 많아져 큰 관심이 없으면서도 지켜볼 때가 있는데, 경기를 하.. 2019. 9. 7.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0)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 우연한 곳에서 만난 짧은 글 하나, 순간 마음에는 등 하나가 켜지는 것 같았다. 작지만 환한 빛이 마음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가량을 가면 아차도가 나온다. 볼음도와 주문도 사이에 있는 손바닥만 한 섬이다. 섬에는 식당은 물론 가게가 하나도 없는데, 가구 수가 30여 호 된다. 그곳에 110년이 된 예배당이 있다. 아차도감리교회다. 처남이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다른 욕심 없이 작은 섬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처남 목사가 고맙기도 하고 미덥기도 하다. 아차도를 처음 찾던 날이었다. 사택 거실에 손으로 만든 단순한 스탠드가 있었는데, 뭔가 글이 쓰여 있었다. ‘一燈能除千年暗’이라는 구절이었다... 2019. 9. 7.
폭염이라는 호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9) 폭염이라는 호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자 대뜸 소식을 들었느냐고 먼저 물으셨다. 성격이 급하신 분이 아니기에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 장로님 한 분이 우리나라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장로님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침에 통화를 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느닷없이 우리나라를 떠날 일이 떠오르질 않아 당황스럽기만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전화를 거신 원로장로님은 당신이 받은 문자를 내게 보내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장로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찌된 영문이지를 여쭙자 문자를 드릴 테니 읽어보라고만 하신다. 생각하지 못한 다급한 .. 2019. 9. 6.
바위처럼 바람처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8) 바위처럼 바람처럼 송기득 교수님이 이 땅을 떠났다. 냉천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송 교수님으로부터 을 배웠다. 신학을 공부하며 함께 배우는 과목 중에 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안도감을 주었고,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교수님께 들었던 강의내용을 지금껏 기억하는 건 무리지만 인간답게 사는 것이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인간다움이 신앙을 담아내는 온전한 그릇임을 진득하게 배운 시간이었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했던 만큼 선이 굵은 삶을 살았던 교수님으로 남아 있다. 강의 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교수님의 젊은 시절 추운 겨울 무일푼으로 무작정 길을 떠난 일이 있고, 거지꼴을 하고 떠돌다가 비구니들만 거하는 사찰에서 머문 적이 있는데, 하룻밤을 묵고 떠나려는 자신에게 .. 2019. 9. 5.
저들은 모릅니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7) 저들은 모릅니다 불가능한 조항 하나만 아니라면 자신도 기꺼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엄격하고 원시적인 그 모든 규정을 지켰을 거라고, 작가 폴 갤리코(Paul Gallico)가 말한 적이 있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규정에는 갤리코가 정말로 원하는 유일한 낙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수준 이하의 그리스도인을 향한 불손한 경멸과 넘치는 멸시였다. 브레넌 매닝의 에 보면 매닝이 1969년 새해 첫날을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보낼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7명의 ‘작은 형제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몽마르 마을에서 하고 있는 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 포도원에서 일하는 형제도 있었고, 목공과 석공 일을 하는 형제도 있었고, 그런 재주가 없는 형제들은 보.. 2019. 9. 4.
전투와 전쟁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6) 전투와 전쟁 오래 전에 읽은 책 가운데 이란 책이 있다. 종종 생각나는 대목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투와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수도자 두 명이 그들의 사부와 함께 앉아 수도원 생활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한 수도자는 늘 장황하게 지껄이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기를 좋아했다. 그에 비해 또 다른 수도자는 그저 더없이 어질기만 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 날도 공부를 많이 한 수도자는 특유의 논리와 논법을 기술적으로 사용하여, 형제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 묶으며 공박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은 토론에서 이겨 만족해하는 것을 결코 승리라고 보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수재라고 보지도 않는다. 토론이 계속되는 동안 침묵을 지키며 주의.. 2019.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