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즐거움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

 

더불어 즐거움

 

종갓집 장손(長孫)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사랑방에서 조부님과 단 둘이 겸상을 했다. 조부님이 일러주신 엄격한 격식에 따라 음식을 대해야만 했다.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하는 방법에서 음식을 집는 법과 입속에 넣고 저작하는 방법까지 수십 가지의 식사 예절을 배우고 익혔다. 그러느라 정작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 상 위에 놓인 음식 중에 어떤 것이 맛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안방에선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식구들이 모여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음으로 늘 안방에 모인 식구들을 부러워했다. 격식 없이 웃으며 즐겁게 식사하는 틈에 나도 끼고 싶다는 생각만 안개처럼 뽀얗게 일어났다. 때문에 철저하게 즐거움이 배제된 나의 식탁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경전의 자이다

 

맹자(孟子)는 진정한 즐거움에 대해 문왕(文王)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느 날 문왕이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고 싶어 했다. 물론 두터운 담장을 휘둘러 왕 혼자 즐기기 위해 연못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도가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백성들은 하던 일을 모두 집어 던지고 문왕에게 달려와 연못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마치 자식이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듯 했다고 맹자는 기술하고 있다.

 

백성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못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는지 문왕이 서두르지 말 것을 권할 정도였다. 전적으로 백성의 도움으로 연못이 꾸며졌다. 그러나 백성들이 도리어 즐거워했던 것은 문왕이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은 문왕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더불어 기뻐하는 이러한 상황을 맹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옛사람은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 즐거울 수 있었다. (古之人 與民偕樂, 故 能樂也)-⟪맹자⟫, ⟨양해왕 상⟩2장 3절

 

춘추전국시대의 대부분의 군주들은 작은 계산속으로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많이 차지하여 자산을 든든하게 만들고, 백성의 숫자를 확보하여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몰두하였다. 이를 위해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찾아다녔고, 국가 시스템을 잘 구축하기 위한 방법을 항상 고민하였다.

 

백성들은 늘 통치자의 명령에 시달렸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사로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들에게 기쁨,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상관없는 용어였다. 모든 즐거움은 군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경제력을 공교히 만드는 일은 군주에게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확보된 자금으로 왕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연일 잔치를 벌이는 일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처럼 모든 즐거움을 군주가 독점해버린 국가는 얼마 되지 않아 타국에 의해 또는 백성들의 원성에 의해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맹자는 예전 전설적인 왕들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었던 것을 동경하였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오면서 백성들의 피폐함과 귀족들의 욕심을 지켜보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였다. 왕과 백성이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 애쓰는 이상적인 정치시스템을 제시하였다.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로 생각해본다. 이 큰 덩어리 이야기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에게로 가까이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With) 음식을 먹는다고 시비를 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 속에서 자연스레 ‘그들’은 친구와 이웃(Friends and Neighbors)이 된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의 한 사건 속에 세 개의 작은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것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의 이야기, 다음 것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 이야기 그리고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자리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기쁨’ 또는 ‘기쁘다’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나아가 ‘기쁨’의 의미를 확장시키면 세 종류의 단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쁨’ ‘기쁘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즐겁다’ ‘즐기자’의 단어가 있다.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함께 즐거워하다’라는 단어이다. 놀랍게도 이들 단어는 세 이야기 속에 모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카라’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은은한 즐거움을 의미한다. 즐거움이라는 단어 역시 원어로 ‘카이로’라고 하는데 즐겁고 행복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려는 ‘함께(With) 즐거워하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슁 카이로’로 발음되고 ‘더불어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31-32).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근심어린 말 속에 큰 아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큰 아들의 잘못은 더불어 기쁨을 모른다는데 있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한다는 작은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큰 아들에겐 기쁨을 독차지하려는 마음뿐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이야기 모두 ‘잃어버림’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찾아다님’ 그리고 찾아서 ‘돌아옴’과 즐거움을 ‘함께 나눔’으로 끝맺는다. 세 이야기 모두 기쁨이나 즐거움에서 출발해서 ‘더불어 즐기자’라는 단어로 끝난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누가복음 15장에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씩이나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를 대단히 강조한다는 것을 말한다. 세 번씩이나 거푸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훌륭한 음식도 혼자 먹으면 너무도 맛이 없다. 여럿이 더불어 즐거움 가운데 먹는 음식은 비록 거칠어도 맛이 있다. 예수께서는 더불어 먹는 음식의 중요한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음식 나눔으로 구원의 역사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셨다.

 

즐거움은 독점하거나 사유화할 수 없다. 독점하거나 사유화한 즐거움인 이미 즐거움이 아니다. 나누고 베풀 때, 함께 공유할 때, 즐거움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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