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 되려하지 말라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2)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

 

시골 마을에서 선생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노인들은 선생에게 가서 글을 묻기도 하고 심지어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해달라고 하거나 선거 즈음엔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한 때 국가가 정부시책을 펼칠 인력이 부족하면 제일 먼저 교사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나의 외조부님은 인제읍내에서 내린천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귀둔’이란 동네의 훈장이셨다. 외가댁은 그곳에서 대대로 훈장으로 지내시면서 마을의 유지로 지냈다. 외조부님은 마을의 온갖 일에 관여하시면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셨다. 덕분에 나도 어릴 적부터 외조부님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울 수 있었다.

 

맹자가 활동했던 전국시대에 무수한 선생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일어나 자기 사상을 펼쳤고 추종자인 제자들을 확보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학습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학습공동체를 형성하여 단순히 세력만 과시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결속력을 구축함으로 타학문에 대한 심각한 배타성을 띠게 되었다.

 

상대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깨뜨리기 위해 자기 논리의 날을 세우고, 자기 논리를 든든하게 하려고 치밀한 방어막을 에둘렀다. 강한 논리를 갖추었다 싶으면 군주를 찾아가 자신의 논리를 실험할 수 있는 지위를 달라고 요청했다. 재상의 자리에 앉혀주면 자신의 논리를 펴서 군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환란은 선생노릇을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

- ⟪맹자⟫, ⟨이루 상⟩23장

 

공자와 더불어 맹자가 특별히 사친(事親)을 강조하는 것은 ‘섬김’이라는 귀중한 덕목 때문이다. 자녀로서 부모를 섬기고,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라는 덕목에서 강조점은 섬김에 있다. 섬김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일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맹자는 사친(事親)과 짝을 이루는 덕목을 수신(守身)이라 했다[事親 事之本也, 守身 守之本也 - ⟨이루 상⟩19장]. 수(守)는 ‘지킴’이다. 수신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유혹과 환란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자신을 올곧게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일이며, 자신의 존재성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섬김’이 ‘지킴’과 짝을 이루게 한 것은 섬김이 혹 비굴함이나 억지로 낮아짐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중심을 공교히 하지 않고 무조건 낮추는 것은 어리석음이나 자기비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킴이 섬김을 만나지 않으면 교만으로 변하기 쉽다. 자신을 남들 앞에 내세워 높이는 것으로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경전의 자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지칭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마 23:3)”고 말씀하셨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에게 짐 지우면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높은 자리를 쉼 없이 탐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마태복음>, 23장 8절

 

예수께서는 둘러선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랍비가 되지 말라고 한다. 유대인은 예나지금이나 랍비가 되는 것을 대단한 명예로 생각한다. 유대인 어린이들의 최고의 희망은 랍비가 되는 것이다. 현재 랍비라는 단어가 ‘나의 스승’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 이 단어는 ‘크다’ ‘위대하다’는 어원에서 출발했다.

 

랍비(Rabbi)는 ‘크다’라는 뜻의 ‘라브(rab)’에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나의 주’,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이다. 처음에 랍비는 ‘크신 분’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인생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 내가 본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것이 점차 ‘선생’이란 뜻으로 변하여 유대인의 율법 교사를 존경하여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도 하나이고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브(ab)’이다. ‘아브’는 육친의 아버지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제사장이나 왕, 노예의 주인이나 선지자도 ‘아브’라고 불렀다. 여러 측면에서 스승을 지칭하는 ‘라브’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아브’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는 명쾌하게 결론을 짓는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13)” 위대함은 자신의 낮춤과 상대의 섬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 지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선생이 많은 우리 시대이다. 선생 되려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배우려는 이들보다는 가르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은 시절이다. 낮음보다는 높음을 선호하는 시대이다. 타인의 머리를 밟고 서있는 쾌감을 꽤나 즐기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온갖 문제는 선생 되려는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남을 밟고 일어서려는 탐욕으로부터 시작된다.

 

외조부님의 생신날은 마을 사람들의 잔칫날이었다. 특히 빈궁한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과 병으로 인해 찌든 생명을 간신히 꾸려가는 분들을 위한 날이었다. 마당 그득 그분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모든 일가친척들은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야 했다. 철없던 시절, 굳이 저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느냐고 외조부님께 물었다가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아직 제 자신이 상당히 덜 익은 나로선 타인에게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타인을 섬길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제대로 세운 사람이다. 안으로 자기를 제대로 세운 자만이 타인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고이는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다. 스스로 높인다고 결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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