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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김석기를 기억한다

by 한종호 2016. 1. 19.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21)

 

김석기를 기억한다

-그를 위한 변명이 불가능한 이유-

 

 

*이 글은 2013년 11월 23일자 세계일보 논설위원 조정진씨의 칼럼 <김석기를 위한 변명>을 읽고 썼던 글이다. 그 글은 여전히 인터넷에 남아있으니 누구든 찾아 읽어볼 수 있다.

 

조정진이라는 개인

 

<세계일보> 논설위원 조정진씨의 칼럼 <김석기를 위한 변명>을 읽었다. 나는 <세계일보>를 읽어본 일이 거의 없다. <세계일보> 같은 신문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세계일보>에 대한 어떤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용산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남일당 망루에 오르기까지, 자신과 가족들의 힘겨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치대며 시달려온 가족사에 대해 조정진 논설위원이 무관심한 것과 대략 같은 무관심이다. 내게는 <세계>에 대해 할 말이 없었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과 무관히 존재하는 타인에 대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을 도구로 존재감을 나타내려거나 심지어 적대행위로 이익의 수단을 삼는 부류들을 본다.

 

예부터 빌린 돈은 돈으로 갚고 살인한 자에겐 목숨으로 되갚게 하는 게 법이다. 하물며 행인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특히 누군가의 가해가 그에 합당한 보상적 타격으로 맞대응해줄 수단과 역량을 갖지 못한 약자에게 저질러질 때, 그 비열함을 일깨워줄 한마디 정도 불문법적 양심과 양식이란 게 있다. 대결이 정당하려면 링 위의 공정한 룰과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약자를 구타하는 건 깡패들이 하는 짓이지 언론이 할 소위는 아니다. 그런데 조정진 씨와 <세계>는 그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조금 살아본 나는 언론과 논설위원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식의 탄식은 하지 않는다. 내게는 언론이란 말 자체가 공허하다. 언론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논설위원이라는 직책도 의미가 없다. 그가 논설이든 객설이든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지금 상대 인간이 자신에게 받고 있는 대접이 어떤 것인지, 지금 내가 가하는 타격이 어떤 타격일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지위가 높아도 여전히 모르는 법이다. 오히려 언론이니 논설위원이니 하는 그런 제도적 가면들 때문에 더 모를 수가 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들 한다. 어린아이에게도 배우는 게 일생 배움의 도리가 아닌가. 이 글은 그 정도 상식선의 간섭쯤이다.

 

김석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왜 하필 이 시점에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김석기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김석기와 어떤 관계에 있길래 이렇게까지 그를 변명해주려 결심하게 되었을까? 김석기가 그에겐 그럴만한 인물인가? 나는 우선 그 점이 궁금해진다. 그것은 김석기를 위한 변명 이전, 신문사 논설위원의 논설행위 이전에 조정진 씨 개인에게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나의 쟁점사항이기도 하다. 도무지, 왜? 김석기를 위해서라 함은 그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어떤 현실 때문일 터. 그 현실이란 그가 쓴 바와 같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용산사태는 논란 중이다. 유가족과 진상규명위원회는 진압을 승인한 서울경찰청장이던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쫓아다니며 출근 방해와 퇴진 및 책임자 처벌을 외치고 있다. 2009년 말 협상이 타결돼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의 보상비까지 받아냈으면서도 집요하게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김석기는 적시한바 용산사태의 ‘진압을 승인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조정진씨는 진압을 승인한 앞에 있는 ‘용산사태’라는 의문의 바윗덩어리를 너무도 쉽게 건너뛰고 있다. 5년(지금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용산사태가 왜 논란중인지 무엇이 논란거리인지 한 줄의 재고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바윗덩어리는 벌써 뛰어넘은 허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연연하면 안 된다. 앞에도 무수한 바윗덩어리들이 대기하고 있는 데 지나간 일에 발목을 잡혀서야 되겠는가? 용산사태 자체의 논란은 이미 처리되었다. 줄 돈 주고 받을 돈 받았으니 ‘버얼써(!)’ 끝냈어야한다. 그런데 받을 돈(그것도 적지 않은 액수)을 받았음에도 ‘염치도 없게’ 끝내질 않고 있다. 즉 ‘논란 중’이라는 말의 눈은 용산사태가 아니라 김석기를 물고 늘어지는 유가족들의 시위를 바라보고 있음이다. ‘쫓아다니며’ ‘결코 적지 않은 액수’ ‘받아냈으면서도’ ‘집요하게’. 단 세 문장만 읽고도 독자들은 조정진 씨가 심판치고는 상당히 심술을 부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정진 씨가 자신이 쓴 문장을 반성적으로 새겨볼 기회를 가져봤으면 싶다. 그는 자신의 문장을 이어가기 위해 몇 개의 고유성을 지닌 단어들을 사용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정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용산사태’, ‘논란’, ‘유가족’, ‘진상규명위원회’, ‘진압’, ‘승인’. 이 몇 개의 단어 속에 용산사태 논란의 기본적인 사실과 그간의 진행과정과 현재 상황이 다 들어있다. 그런데 조정진 씨가 이 단어들을 이용해 조합해낸 문장의 저울추는 180도 반대편에 기울어져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졌을까? 무엇보다 조정진 논설위원에겐 유가족과 진상규명위원회라는 명칭이 품고 있는 분노와 억울함에 대한 일분(一分)의 인간적 배려가 없다.

 

그것은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감각과 무신경의 범주를 벗어난다. 마치 집요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 같다. 공정한 심판노릇으로서는 지나치게 티를 내버렸다. 적대적으로 사람을 깔아보는 경멸의 심사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어서 빨리 먹고 떨어져 준다면 좋을 자들이 배불리 먹고도 지금껏 눈앞에 알찐거린다는 투다. 우리 사회는 이런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가졌다. 그는 김석기같은 사람이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반대하고 처벌을 주장하는 쟁점에 대해 독자들이 거기 근접이라도 할까 우선 차단부터 실시한다. 조정진씨의 논법에서 이 ‘진압을 승인한’이라는 여섯 글자는 지극히 중립적이다. 그러나 실상은 중립인듯 중립 아닌 중립 같은 말일 뿐. 인간 김석기가 저지른 진실을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마사지하고 들어가는 표현이다. ‘진압 명령’이 아니라 ‘승인’이다. 명령과 승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러니 ‘서울경찰청장이던’ 김석기는 여기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관료고 관념이고 마치 사인해주는 기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승인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계의 중립적 작동일 뿐 그 결과로 사람이 죽었대도 인간 김석기와는 무관하다. 문장대로라면 그는 진압을 승인한 것이지 진압을 실행한 게 아니다.

 

분명 살인이 벌어졌고 김석기의 승인에 의해 발생했다. 그러나 경찰특공대원들은 살인을 한 게 아니라 김석기의 승인을 따른 것이고 김석기는 진압을 승인한 것이지 명령을 내린 게 아니다. (그는 혹시 제3의 진압 명령자를 생각하고 이런 표현을 쓴 것인가?) 그들은 공히 살인극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살인극은 유감스럽게 벌어진 불상사일 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현장에서 살인극을 벌인 경찰특공대도 그것을 승인한 김석기에게도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이게 ‘진압을 승인한’이라는 지극히 중립적인 수사(修辭)의 내용이다. 따라서 인간 김석기가 지금 당하는 현실은 오히려 그가 억울해할 일이다. 누군가라도 나서서 변명을 해주어야 한다. 마침 신문사 논설위원인 조정진씨가 그 일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기억해야할 이름 김석기

 

장하다. 언론인으로서 보통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진실을 깨우쳐야겠다는 그의 사명감. 그러나 말로써 사회를 혼탁케 하고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말은 이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문자를 읽지 말고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마따나, 그의 행간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그의 드높은 논설위원으로서의 근자감과 그것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비열과 뒤틀림이다. 바로잡는다.

 

우선 김석기는 흔히 쓰는 말처럼 사안의 진위 여부를 떠나 변명해줄 여지가 없는 용산사태의 책임자다. ‘용산사태’라함은 용산의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벌어진 인명살상행위를 말한다. 인명살상을 불사한 그의 과도한 ‘진압을 승인한’ 행위로 여섯 명의 목숨이 불길 속에서 타죽었다. 그의 진압명령이 없었더라면, 있었더라도 인명살상에 이르러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침이 있었더라면,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현장 지휘자가 책임져야할 것이라는 분명한 언급이 있었더라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뉘앙스만 풍겼어도 그들은 감히 그런 짓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의 뉘앙스가 풍겼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러니 그의 책임이다.

 

물론 현장에서 진압작전에 가담한 특공대원들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죄는 김석기보다 조금 작고 어떤 의미에선 김석기보다 더 직접적이고 크다. 크든 작든 그들은 살인극의 공동협력자들이다. 이건 거기서 죽임 당한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보복이 가능하다면 과연 누구를 향해 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죄도 없고 책임도 없다? 헌법에 보장된 공권력이니 그렇다? 천만의 말씀이다. 법은 본래 복수를 위한 것이다. 법이 금하는 것은 사적인 복수일 뿐이지 복수 자체를 금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죄가 어디 있겠는가? 히틀러인들 변명이 없을까? 아우슈비츠의 집행자들이라도 할 말이 없을까? 용산사태가 그것과 다르다 주장할 텐가?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름이 있다면 히틀러와 나치는 2차 대전에서 패했고, 용산에서 사람을 죽인 자들에게 돌아갈 공적 복수를 막아주는 권력은 아직 패배할 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기세등등하다는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 논설위원이 아닌 인간 조정진씨가 이런 칼럼을 쓸 수 있는 근거도 거기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김석기가 뭔가 쌓은 공적의 논공행상으로 주어지곤 하는 국영기업(한국공항공사)의 사장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만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공적을 쌓았던가? 적어도 그가 공항업무에 탁월한 식견이 있어 발탁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면 그가 무슨 공로를 세웠던가? 용산에서 자신을 기용한 이명박을 위해 그가 보여준 충성심. 그 외에 기억에 남을 공로가 있는가? 그러므로 김석기는 변명되어야할 이름이 아니라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할 이름이다. 김석기라는 사람, 용산에서 벌인 살인극의 명령자, 그가 그 공로로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된 것. 그것이 유익한 의미일지 유해한 의미일지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되어지고 있음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김석기가 태어날 것이냐 태어나지 못할 것이냐 하는 식으로. 제2, 제3의 용산 살인극을 벌일 것이냐 못 벌일 것이냐 하는 문제로 말이다.

 

<세계일보>란 독특한 세계

 

가령 왜 그는 그 당시 그러한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 명령을 내렸던 것일까? 과연 조정진씨의 말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쇠구슬 때문이었을까? 정말 민간인들의 안전을 위해서였을까? 남일당 망루위 시위자들이 지나가는 민간인들에게 무작위로 쇠구슬을 쏘았다는 것인가? 정확을 기하기 위해 다시 물어본다. 김석기가 그러한 진압명령을 내릴 당시, 정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시위자들은 행인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쇠구슬을 쏘아대고, 김석기는 서울경찰청장으로서 행여 쇠구슬에 민간인이 맞을까 걱정이 되어 노심초사하다가, 급기야 ‘이젠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진압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인가? 소설의 설득력은 온전한 상상력일 텐데, 그런 의미에서 조정진씨는 얘기를 꾸며내는 재능은 욕속부달(欲速不達)이다. 인간 김석기에게 고뇌가 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런 고뇌는 아니었을 것이다. 도입부이다.

 

2009년 1월 19일 막 출근한 동료 기자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하마터면 쇠구슬에 맞을 뻔했다”며 투덜거렸다. 무슨 얘기냐고 묻자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철거민들이 새총으로 마구 쏘아 가방을 머리에 대고 겨우 피해 왔다”고 했다. “경찰은?” 하고 되묻자, “구경만 하던데…”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다른 기자는 “화염병도 던지더라”고 했다. 누군가 용산경찰서 정보과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일당 상황 아느냐? 무고한 행인을 위협하는 걸 놔두는 건 문제 아니냐”고 따졌다.

 

조정진 씨는 이러한 미흡한 소설적 구성으로 용산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극 전체를 불가피하게 일어난 하나의 ‘사태’라 강변한다. 이 소설에 의하면 경찰은 오히려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게 조정진 씨의 마사지 기법이다. 그러나 정확을 기하기 위해 일일이 확인해보자. 여기에 나오는 동료기자는 <세계일보> 기자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사색이 된 언구럭에 ‘무슨 얘기냐’며 천진스럽게 묻는 척 남일당 얘기를 듣자 ‘경찰은’ 어쩌고 반문한 것은 조정진 씨 자신이었다. 그 다음 ‘화염병도 던지더라’라고 한마디 첨가한 사람도 필시 <세계일보> 기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이게 말이 되느냐?’ 분기탱천 용산 경찰서 정보과 형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군가’라고 적었다. 나는 생각해 본다. 그 누군가는 조정진씨 자신이었거나, 소설일 뿐이거나, 아니면 <세계일보>란 신문사가 평소 본래 그런 정도의 세계일 것임을 짐작케 해주는 장면인 것이라고.

 

첫 장면. 세계일보 기자는 쇠구슬에 맞을 뻔 했다. 왜? 그 자리에 갔기 때문이고 진압하는 자들 쪽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구경만 했다’는 서술은 마치 쇠구슬은 <세계일보>기자에게 마구 쏘았고 경찰은 이를 구경만 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다음 기자는 곧 무고한 행인이 된다. 무고한 행인들 가운데 하나가 된 건지, 무고한 행인의 대표적 상징이 된 건진 모르겠다. ‘투덜, 마구, 볼멘소리, 무고한 행인을 위협’ 이게 이 초간편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일보>기자들과 조정진 씨가 보았던, 보여주고 싶은 용산사태의 전편이다. 조정진 씨는 이런 정도의 거친 소설적 설득력으로 그 다음날 일어났던 용산 사건 전체가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더 나아가 지극히 합당한 조치였음을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조정진씨의 글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 이 글이 비록 그의 입장에서는 진실한 것일지라도- ‘<세계일보>란 세계는 이런 세계로구나!’하는 특이함이다. 그들은 매우 독특한 세계 속에서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음이 틀림없다.

 

김석기를 위한 변명은 불가능하다

 

조정진 씨는 그렇더라도 나는 김석기라는 이름만 들어도 곧바로 용산에서의 살인극이 떠오른다. 그것을 대충 얼버무려 ‘용산사태’ 혹은 ‘용산참사’라 부르지만 나는 그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령 쓰나미나 태풍처럼 진짜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따질 수 없는 불가피한 자연의 사태가 아니었다. 가해자가 있었고 그 가해를 통해 죽음에 이른 피해자가 발생한 살인이었다. 의도성이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날 벌어진 사건의 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적어도 <세계일보>는 아닐터― 기자들까지도 ‘저기 사람 죽는다!’고 울부짖었었다. 백주 대낮에 사람들과 방송이 인터넷이 생중계를 해주는 그 현장에 김석기는 그렇게 밀어붙이라 명령했다. 그를 서울경찰청장으로 임명한 자가 그에게 부과한 첫 사명이기도 했다.

 

그럴지 안 그럴지 모르겠지만 김석기가 혹여 자신의 운명을 억울해한데도 소용없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그가 살아서 그 행한 살인에 대해 회개하고 합당한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 살아서 받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불명예스러운 살인명령자의 패찰을 떼지 못할 테니까. 그게 안 된다면 그가 죽어서라도 갚음을 받아야한다고, 받게 될 거라고, 그것이 그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한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가령 김일성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평가와 같다. 구원은 반드시 선행을 통해서만 받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서 영화 <미션>의 원주민들을 위해 싸우다 죽는 스페인 용병대장으로 로버트 드 니로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그가 한국공항공사 사장 같은 버젓한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안 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조정진씨나 <세계일보>의 세계 같은 세상이 감싸주고 변명해주어도 감싸지지 않고 변명되지 않는 것이다. 전철연을 끌어다 붙이고, 전문 폭력시위꾼으로, 돈을 바라는 협잡꾼들로, 아무리 딱지를 붙여도 하늘을 가리는 손바닥일 뿐. 김석기를 위한 변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조정진 씨가 글을 쓰는 진정한 이유처럼 김석기도 조정진이 변명해주려는 그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죄는 숨겨져 있다. 살인에 대한 의지와 고뇌와 양심의 가책과 그것을 무릅썼던 살인의 잔혹한 고의성. 그야말로 꼴통이 아니라 약간의 지성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우리가 말하고 갖다 붙이는 여러 명색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명색이란 말 그대로 진실에 대한 변명일 뿐이지 변명에 대한 진실일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조정진 씨의 글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김석기를 위하여 변명하지 마시라. 내 보기에 그대가 아니한대도 김석기의 남은 일생은 변명일 뿐이다. 우리는 그의 변명하는 남은 일생의 향방을 그대로 보면 된다. 한 회개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끝까지 자신을 비겁하게 변명하며 세상을 비루하게 물들이는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6).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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