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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by 한종호 2015. 12. 19.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9)

 

이별의 인사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1.

 

새해가 되면 팔순이 되는 우리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나를 깍쟁이라고 부르셨지만 지금은 그 깍쟁이와 함께 살고 계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얼마나 깍쟁이인지 잘 알고 있고, 내가 간혹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탄식할 때가 많다. 세상에 자식을 알기로 그 어머니만 하겠는가. 어머니의 깍쟁이라는 말은 모름지기 나에게 적확한 비난이면서 가르침이고 매질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내가 깍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오늘날까지 해결해내지 못한 나의 이 깍쟁이스러움이 이쪽저쪽으로 역동을 하여 나의 두 측면의 성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하나는 깍쟁이로서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깍쟁이라는 것을 못견뎌하는 나이다. 자주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은 모든 잘못을 나에게 돌리면서 이 모든 게 마치 나의 원죄(原罪)처럼 생각된다. 원죄의 용서란 그리스도의 공로밖에 빌 데가 없으니, 묻노니 이 나의 원죄는 과연 내 인생에서 해소될 수 있을까?

 

2.

 

당신은 내가 당신에 대한 우정을 철회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늘 기다리며 당신의 우정 어린 너그러움을 기대했었는지를….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었는지를. 지금껏 내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질투로 살아왔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꿈에라도 그런 마음을 품을까 두려워했지요. 어찌하다 그런 마음을 남겨둔 채 인생을 끝내게 될 수도 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실에 의탁하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바랐었지요. 만일 그들이 다시 내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한다면 지나간 일들을 아예 잊어버리고 도리어 내게 손 내민 그 일에 위로받고 감사했을 겁니다. 그 일로써 나는 또 남은 날들을 살아갈 따뜻한 위로와 당당한 용기를 갖게 되었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깍쟁이요 냉정하고 굳은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나는 여리디 여린 한 영혼.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고 친밀함과 애정에 목말라하며 존경과 칭찬을 기대하는 한 풋내기 청춘. 그 정도가 얼마인지 그 욕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력하고 일관된 것인지 그 정열이 얼마나 굽힐 줄 모르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당신은 내가 냉정한 사업가라고 여기실테지만, 아닙니다. 저는 사업할 줄 모르고 계산에 정확하지도 않으며 대충 대충 넘어가는 어리숙한 시골사람. 셈법의 치밀함 보다는 사람의 정리를 더 깊이 헤아려왔습니다. 당신은 내가 율법의 재판관이라 여기실 테지만, 아닙니다. 나는 도리어 그러한 당신의 율법에 의해 재판받는 죄인입니다. 나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가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할지언정,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판단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냉정하고 따지기 좋아하고 까다로운 논쟁가라고 여기겠지만, 아닙니다. 나는 이 모든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 당신만은 저는 그런 위인이 아니라 변호해줄 그런 변함없는 우정을 기대하였습니다.

 

 

 

3.

 

나는 좀 미신적인 데가 있다. 나의 현재의 사건은 과거의 나의 사건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것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죄와 벌, 공과 상, 보상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성이 들어있는 것이라 믿는다. 가령 옛날 사람들이 해준 말 가운데는 ‘항상 그런 일이 딱 그렇게 일어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어느 시점에 어떤 일들을 겪고 나면 ‘과연 옛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구나!’ 하게된다. 나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서. 그러니 이번 일은 나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쩌면 내게 꼭 필요한 이유가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내가 유사한 길을 통과했던 이력을 되새겨 볼 때 그렇다. 그러니 내가 이 일을 겪는 것은 내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확실한 통과의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하나님의 예정과 기획이 들어있다. 마치 나를 위해 딱 그렇게만 되도록 안배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손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이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모든 내 미신으로부터 나를 졸업시키시고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 밖에 내가 걸어온 길의 진실을 누가 알겠는가.

 

4.

 

연말에 만나자는 연락들. 그들은 돈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돈이 없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돈이 없다. 줄 것이 없는 나는 나를 윤리적으로 탓하고 나의 윤리성을 탓한다. 어찌할까 하면서 어찌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 자신도 어찌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어찌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어찌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찌할까? 그가 원하는 그것을 줄까? 깍쟁이처럼 굴까? 모른 척 할까? 인생이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순간에 뒤바뀌는 역동의 묘미가 있다. 나는 피해자가 되었다가 너무 피해자가 된 나머지 가해자가 되는 참담한 기분에 빠진다.

 

어렵다. 이 어찌 돈 문제뿐이겠는가. 주지 않은 빚. 받지 않은 빚. 주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은 인간관계의 빚이 마치 처치 곤란의 눈쓰레기 더미처럼 쌓여있다. 빚에 눌려 인간들은 서로 속고 속이고 속은 척 하고 속이는 척한다. 죽는 소리를 하고 앓는 소리를 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어깨에 힘을 주면서 안 죽겠는 척을 한다. 그리고 더러는 하나도 안 아프고 하나도 안 괴롭고 하나도 안 죽겠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눈물을 흘리는 것일테지? 가식적으로 흘리고 진실하게 흘리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줄 돈이 없어 게으르다. 기적은 정녕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냐?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떤 극적인 기적을 기대하고 있다. 기적에 기대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니 기적을 바라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처를 바라는 것.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는 하지만 더 이상 같이 갈 수는 없으리라는 것도 받아들인다.

 

5.

 

오늘 나는 하루 종일 노동을 했고, 오늘 나는 병원에 가서 임플란트를 해 넣으려고 마취를 하고 잇몸 뼈 속으로 철심을 박았고, 오늘 나는 몇 통의 힘들다는 전화를 받았고, 오늘 나는 택배로 약을 받았고, 오늘 나는 추운데 나가서 배회하면서 깊이 회개하였고, 오늘 나는 … 사랑하는 형제님 자매님, 저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 안하셔도 됩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그냥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저를 놔두어 주는 것이 제게는 더 좋을 것 같아요. 마음은 다 이해하고 다 납득합니다. 뭔가 우리의 세월을 이름 지을 마무리 멘트 한마디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저를 위한 거라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어준 은혜와 진실은 하나님께서 다 아시니까요. 추운데 힘든 일일랑은 생략합시다. 오늘 나는 2011년도의 마지막 날에 맘먹고 깍쟁이가 되려고 하였다. 두려움 때문에. 혹시 내가 마지막까지 깍쟁이가 되지 않으려 하다가 주님의 일을 망칠까봐. 그리하여 나는 오늘 또 한 번 깊이 절망하면서 회개하였다. 이 세상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닌데… 아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오늘 그대와 나는 갈 길이 다르므로, 잘 가시오. 부디 잘 가시오.

 

*사족

 

나는 최근 오랫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를 떠나보내는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그 글을 읽고 생각나 오래전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날 나는 이 편지를 이별의 편지로 알아달라고 썼던 것인데, 만족하지 못했던지 그들 부부는 끝내 이별의 인사를 마무리 지으러 나를 찾아 왔다. 말하자면 성탄절 선물을 결별로 받은 셈이었다. 좋은 말로 헤어질 수는 없었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친밀함을 난처히 여겨 못했던 말들을 쏟아놓았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아팠을 수도 있었겠지만 끝내 이별의 인사를 하러 온 심사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고, 목사로서 마지막까지 좋은 말만 할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라 내 마음은 무연하다. 나도 받을 것을 받았고 그들도 받을 것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지난 장인어른의 장례식에 얼굴 좀 보자고 청했을 때, 문자만 보내고 끝내 오지 않았을 때, 나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내 인사만 차리고 싶은 모양인가 싶었던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란 말도 있지만, 회자정리 후에 반드시 거자필반할 필연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만나지 못하면 그게 무에 대수랴. ‘A River Runs Through It.’ 강물이 시간을 통과해 흘러가는 것인지, 시간이 인생을 통과해 흘러가는 것인지. 내가 강물이든 시간이든 아픔이든 헤어짐이든 바로 그것을 통과해 흘러가는 것. 나는 헤어짐에 아파하는 페친에게 옛날의 내 동병상련으로 위로를 해드리고 싶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비록 달의 행로를 되밟을지라도.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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