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진리는 하나다

딸들에게 주는 편지(4)

 

모든 진리는 하나다

 

 

자기를 사랑하는 내가 있는데 또 나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이고 저들은 누구이고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은 저들에게서 오고, 저들의 생각은 나에게로부터 생긴다. 빼어난 천재의 영감은 그보다 더 월등한 전체의 의식으로부터 주어지고 천재는 그 답례로 공동체에게 그를 낳은 보람을 선사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고 고상하거나 천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가 높고 낮은 것이며 우리 모두가 고상하고 천박하다. 전체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공부가 깊어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그것들을 사랑한다고, 사랑해야한다고 말하지 마라. 도스또옙스끼(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는 자기 자신은 전(全)인류를 사랑하는 의로운 인간일지라도 바로 옆에 누운 동료 한 사람을 전 인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미워했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 주변에도 매우 친절하고 상식적인 사람이 자신의 부모형제와 원수로 지내며 일생동안 내왕조차 없이 지내는 경우를 왕왕 본다. 남 얘기가 아니다. 잘 헤아려 천천히 가야한다.

 

너무 빨리 누군가에게 너를 맡기려하지도 말고, 한 단체에 경솔히 가입하려고 하지도 마라. 할 수 있는 한 너희들 자신을 얽매임 없는 가운데 놔두어라. 공부의 자유와 즐거움을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중략)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린도 전서 7:25-38).

 

매일 40여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고,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증가하고, 결국엔 ‘견디면 암 못 견디면 자살’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이 나라에서 결혼을 축복하고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책임 있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나도 결혼식 주례를 여러 번 섰지만 자살하고 이혼하고 파괴되는 모든 가정이 그런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출발했다가 결국엔 지옥의 경험으로 끝났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이상 혼인의 주례가 되기가 주저되기도 한다. 이제야말로 결혼식 주례 같은 축복의 설교에 파묻혀버린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처녀의 결혼에 대한 반대와 금지의 말이 아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고 본질에 충실한 삶이고 거기에 맞춰진 뜻과 지향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이러한 진리와 진실의 길을 추구해 나간다면 더 바랄 바 없이 좋겠다.

 

 

                                 일러스트/고은비

 

 

인생은 장애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다. 장애가 아주 없을 수도 없고 있다면 있는 대로 의미가 있다. 너무 많아 온통 그것을 돌파하느라 정신이 없으면 그것만은 불행이다. 나는 사도 바울처럼 너희를 아끼므로 장애가 가급적 없기를 바라고 있더라도 쉽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미리부터 장애를 대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필요하다. 운동선수가 기본 폼을 익히는 과정처럼 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사는 법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려 평안에 머문다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사람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항상 자기의 주인으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은 자기 가계의 규모를 파악하고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안다. 의지와 의욕을 가지고 일한다. 곧 혼란 가운데서도 시야가 트이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눈이 밝은 것이다. 그러면 매사 말이 분명해지고 뜻에 힘이 생긴다. 너희 자신의 손님(생각)들의 방문을 통하여, 세상과 사람들이 너희에게 주는 생각들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가 주는 생각들을 통하여, 너희 자신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너희의 할 일, 할 공부, 살아갈 목적과 의미와 방식을 결정해 준다. 근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근본적인 것을 사랑한다.

 

다만 우리의 사랑이 자기 몸 하나에 국한되고, 우리의 지식이 기껏 자기가 살아온 몇 십 년 깜냥에 그치게 되면 공부의 보람이 무엇일까? 여기서 사람 사는 재미를 앗아가는 온갖 이기적이고 얄미운 행동들이 나타난다. 출세를 하던 성공을 하던 돈을 많이 벌든 그것은 저마다 제 자랑에 불과한 것이니 다 남을 괴롭히는 노릇이 아니냐. 공부의 목적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 속으로》는 막심 고리키( Максим Горький, 1868~1936)의 자전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그 원뜻은 ‘브 류쟈흐(В людях)’, 곧 ‘사람들 속으로’라는 의미다. 거기엔 꼭 나도 우리 동네에서 한 몇 십 년 함께 살며 보아온 듯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중이니 군중이니 민중이니 하는 거창한 이름에 속지 마라. 개혁이니 진보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에 기대하지 마라.(물론 그 반대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너희들과 나처럼,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부터 출발이고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몇 사람이 아니어도, 그 수가 적어도 얼굴과 얼굴 마음과 마음이 마주쳐 열정이 솟고 불꽃이 튕긴다. 서로의 감정을 토해 놓으면 자기와 똑같아 어느덧 속이 시원해지고 뿌듯해지고 함께 사는 세상이 나를 지지해주는 용기로 환해지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너희도 조금은 알겠지만 소위 똑똑하다는 빈 수레가 항상 더 요란한 법이다. 많은 숫자와 인기와 대중의 권력 속에 자기를 동일시하며 들레는 것은 개구리가 한껏 공기를 들이 마시고 배를 부풀려 자기를 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이사야 2:22) 과한 욕망을 부리지 말자. 생명은 그 코에 있으니 고작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이다. 얼마든지 마실 수 있고 힘들여 억지로 마시는 게 아니라 저절로 마신다.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공부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이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의 원리’와 더불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고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1) 이 자연, 이 땅은 그 로고스(λόγος, 말, 언어, 중개자,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인간에게 도무지 상관없는 곳이 된다. 인생은 어둠 속에 핀 곰팡이처럼 낯선 곳에서의 무의미와 공허로 떨어지고 그런 사람의 일생은 무언가를 남길 이유도 기억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천지간의 이 로고스를 만났다는 것이다. 곧 유교가 말하는 성인의 중용(中庸)이나 불교의 해탈(解脫, 깨달음)이나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근본이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제 성에 차다 못해 넘치는 바가 있어 견디지 못할 위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또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성철의 ‘불교’라는 말에 밑줄을 치고 그 아래 ‘기독교’라 써 넣으리라. 고백컨대 나는 불교보다는 내가 믿는 기독교가 수승(殊勝)하다고 보니까. 다 시원하고 유쾌하진 않은 말들이다.)

 

동양에는 자고로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가 있었고 그 후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의 조건이 다를 리가 있겠는가? 결국 모든 가르침은 하나, 곧 진리는 하나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모든 가르침들의 다른 제도와 외형에 착념할 뿐 본질적으로 같은 조건에서 나온 같은 공부의 결과(가르침)라는 점은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곧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피만 보는 것이다.

 

너희가 나와 자주 다녔던 우리나라의 유명사찰들을 생각하면 비슷비슷한 법당들과 불상들과 탑들과 울긋불긋 현란한 단청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면 그것보다는 훨씬 단조로운 강대상과 십자가와 성가대를 보게 된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지만) 성당에 가거나 청진사(淸眞寺, 중국의 이슬람 사원)에 가보면 또 그에 맞는 여러 건축과 심벌과 문양들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부터 제도와 형식과 예배의 순서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외형이지 본질은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 생명에 이르게 하고 죽음에 방치해두는 것은 본질이지 형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염불인가, 젯밥인가? 진리인가, 예배인가? 본질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은 ‘반드시 그렇게만 하여라’고 신께서 직접 일러주신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는 진리 안에서 이방인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고 유대인은 이방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들은 다 인간들이 고안해낸 제 나름의 형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만이 옳다’, ‘오직 내가 하는 이 형식과 법칙이 유일한 진리의 형식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몸에 두른 표범무늬 외투를 과시하느라 정작 그것이 빌려온 것임을 잊어버린 것과 같다. 파티가 끝나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갈까?

 

본질을 망각한 종교의 허망함이란 바로 그 신을 내세워 인류 역사를 종교전쟁으로 물들이고도 정작 자기 종교 안에서조차 참된 진리를 구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증명된다. 하물며 기독교 신앙의 외투를 두르고 실제론 자기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싸우면서도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뭐든 잘 될 거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일까. 너희는 결단코 그런 소란에 가담하지 마라. 그런 자들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어떡하든지 남의 노동을 빌어 제 밭을 경작하려는 자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기독교인이므로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이다.

 

오직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의 자기와 같음을 이해하고 그 공통의 사랑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만이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 저절로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이라는 세계의 한 법칙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자와 붓다와 노장의 가르침이 결국 후대에 와서 하나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아직도 나만은 당신들과 다르다 주장하면서 그 다름이 왜 어떻게 다른지 설명도 하지 못하는 자칭 선생들이 많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야고보서 3:1).

 

그들이 심판을 받든지 말든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일까. 그러나 많은 악영향을 후세에 남겨주는 것만은 상관치 않을 수 없다. 그들 중에는 노골적인 종교사기군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전부는 아니다. 착하기는 착하되 무섭게 착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선량하긴 선량하되 너무나 선량한 나머지 어쩌면 주님을 위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법한 자들도 있다. 어떤 남녀들은 마치 종교적 좀비와 같아 아예 말도 통하지 않고 다른 말은 일체 들으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진리의 하나 됨에 있어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부류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노골적인 사기꾼들을 떠받쳐 준다.

 

이런 것이 어디 기독교뿐이겠느냐. 너희는 할 수만 있거든 그런 자들과 화평을 유지하되 한두 번 말하여 뜻이 통하지 않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어라. 쌀 한 톨 생산하지 못할 공연한 분쟁으로 내내 어리석음에 가슴을 친 경험이 많았던 까닭이다. 내 말은 너희더러 산속으로 바닷가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언 18:1). 자기 소욕을 따르는 것은 결국 지혜에 반하게 된다. 개인의 의식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어디로부터 오는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은 산천초목에 있는 게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핵심은 자기 안에서 ‘자연(自然)!’을 깨닫는 것이다. 누가 너의 안의 자연(스스로 그렇게 됨)의 주인이시냐? 주인에게 잘 길들여진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주인의 갈 곳을 짐작하는 법이다. 채찍을 맞고도 갈 바를 모른다면 매만 더 버는 꼴. 불운이 불운을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더욱, 때가 되어 할 수만 있다면 산이나 바닷가나 고요히 자적할 수 있는 삶은 정녕 행복한 삶이다. 곤궁해져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미리 이 모든 재앙을 피해 은택을 누리는 선량한 인간들도 있게 마련이다. 평안하여라. 평안하여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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