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에 대하여

딸들에게 주는 편지(2)

 

진정성에 대하여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그 다음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말도 아니고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이 둘은 언제나 같이 간다. 같이 감으로써 서로를 보완하고 고쳐주고 완성시킨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먼저는 자신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이 자기 자신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때의 실천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육친(肉親)적 사랑이다. 육친(肉親)이란 곧 내 몸이다. 아빠가 너희를 사랑하듯, 엄마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는 곧 우리의 몸이다. 누가 자기 몸을 이 세계의 전부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억지로 사랑하는 척 수고를 자처하지 마라. 너희 자신조차 사랑할줄 모르면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려 하지 마라. 너희들이 사랑하는 너의 가장 가까운 이들, 네 몸 같은 이들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 사랑이 곧 인류를 사랑하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무엇보다 진정성의 문제다. 진정이란 몸과 마음과 영혼(이건 하나다! 셋이 아니다!)으로부터의 자연스런 우러나옴이다. 때문에 머리로 생각하여 임의대로 생산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세속적이라 속물적이라 하는 말은 거짓으로 진정을 꾸며내어 남에게 자신의 충성스러움을 내보이려는 신념의 상투성이다. 그것은 거짓이고 속임이고 비지니스다. 그런데도 온 세상이 이런 거짓과 속임과 비즈니스를 아무런 성찰과 반성도 없이 드러낸다. 그러면 그에 대응하는 응답 역시 속임과 거짓과 비지니스가 된다. 도대체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또 남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상태도 망각한 채 맞장구를 친다고 곧바로 그와 같이 남을 사랑하게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자연스런 자기의 우러나옴을 알아내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 인정받으려고 남을 사랑하는 척 착한 흉내를 내려고 하는 사이비(似而非) 위선자들이 많다. 이는 다 잘못 배운 것이고 누군가 잘못 가르치는 자에게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선생)들은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 상태의 마음은 버려두고 ‘사랑해야한다, 봉사해야한다, 용서해야한다, 화해해야한다’ 같은 누군가의 좋은 말들을 자기 말인양 영혼 없는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자기 자신조차 실천하지도 않고 실천 할 수도 없는 그럴듯한 율법을 설파한다. 저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7).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바로 그 거저 구원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필요가 없는 자신을 찾는 근본은 망각하고 모두에게 드러낼 수 있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공적에만 집착한다.

 

이는 겉옷은 화려하고 멋지게 차려입었으나 속에는 더러운 속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속옷이야 어찌됐든 겉옷만 잘 입으면 된다는 자기치장의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부터 공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자기 자신을 참되게 알아가는 공부를 시작도 못해본 것이다. 지금까지도 여태껏 자기를 아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가당찮게도 진리의 공부를 가르친답시고 휴머니즘의 교사노릇을 자처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태복음 10:24). 그런 자들에게선 필연적으로 그들보다도 못한 어리배기 제자들이 나온다.

 

 

 

 

너희는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 다음 거기서 얻어진 자신의 무가치함과 어리석음과 경박함과 경솔함으로 진중함을 깨달아 들레지 않고 과장되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는 너희의 진정성을 획득하거라. 그렇게 되면 너희 말은 보다 견실해질 것이고 신뢰할만 할 것이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무엇보다 너희들 스스로 남이 너희를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주게 되는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너희에겐 모든 사람이 너희의 선생이나 더 이상 선생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타인의 비평에 대하여 의연하고 초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연함과 초연함이 가능할 때만 사랑의 실천이든 타인에 대한 봉사든 용서와 화해이든 무엇이든 진정으로 너희가 하고자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를 알게 되어 거기서 나오는 진정이란 이와 같이 자기뿐 아니라 세상을 밝힌다. 굳이 입으로 발설하고 손가락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거짓을 드러내고 천박함을 드러내고 모든 거짓과 속임에 대항해 진실과 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또한 이로써 아직 명확하지 않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진정이란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영혼의 본래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색무취이면서 투명하고 초월적이다. 아첨이나 아부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착한 것도 아니고 칭찬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런 상태로 언제나 그렇게 행할 뿐이다. 본래 그런 상태인 것이고 본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사람이 멈출 곳을 알 수 있다면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안정되리라

지극히 고요하여 욕심이 없어지고

만사가 편안하여 옮겨 다니지 않게 되고

백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일 것이다.

-이탁오(李卓吾, 본명 이지(李贄), 1527∼1602)-

 

너희들은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안정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려느냐? 마음의 진정이 오락가락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것은 그대로 방치해둔 채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 싶다고 하겠느냐? 온갖 근심과 걱정이 ‘아하, 이것이었구나!’ 하고 마음이 포착해낸 하나로 모여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 나가겠느냐?

세상에는 온갖 잘난 척을 하는 선생들이 있어 그들은 제 자신을 속이듯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들을 존경하며 추종하고 그를 위해 그들의 악을 본받기까지 한다. 그들의 거짓과 기만의 사업에 돈을 내고 몸을 내주어 그들의 욕망을 위해 봉사해준다. 그들을 위해 진실과 싸우며 거짓을 변명해주기까지 한다. 이것이 목사(선생)가 학생 보다 많고 사원(교회)이 편의점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잘나고 똑똑하고 모범적인데 어찌 그리 비양심적이고 뻔뻔하며 비열하고 비겁한가. 그 비양심과 뻔뻔함과 비열과 비겁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일 뿐이다.

 

세상에는 드러나진 않지만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야말로 하늘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죽을 때까지라도 자기의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명백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단 한 순간도 이러한 진리를 가까이하는 경험도 없이 날마다 제 스스로 진리의 교사를 자처하고 나서는 자들도 들끓는다. 내 딸들아, 그러한 구태의연한 거짓 선생들에게서 재빨리 떠나라. 구태의연한 거짓 선생들을 한 눈에 척, 알아보아라. 행여 거기 눌어붙어 그들과 함께 바보가 되지 말아라.

 

그리고 언제나 너희들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마음과 영혼의 골방부터 마련해라. 거기서 우선 자유로이 너희를 이렇게 저렇게 연마해라. 너희 자신이 먼저 거짓된 자아(自我)의 망상으로부터, 그 놈이 만들어내는 온갖 유치하고 경박한 희비극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해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공부가 성공적이었다면 언젠가 반드시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너희의 그 구원이 쓰일 데가 있으리라. 딸들아. 설령 쓰이지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느냐. 이미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너희들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너희를 알고 너희가 너희를 알고, 너희가 너희를 알고 있음을 너희가 알고, 하늘이 너희를 알고 있음을 너희가 아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너희 자신이 주체다.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타인의 인정을 구할 필요가 없는 천하무적인 것이다. 명심하여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君子)가 아닌가.” (《논어》, 「학이(學而)」편.) (2015. 9. 5.)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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