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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

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1)

by 한종호 2015. 10. 1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6)

 

 

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1)

 

 

1. 때로, 아니 생각보다 자주, 모정천리(母情天理)는 모정천리(母情千里) 모정만리(母情萬里)이다. 그만큼 어머니가 되는 게 어렵다는 의미이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한나의 삶도 그렇다. 한나의 삶은 천로역정(天路歷程)이 아니라 모로역정(母路歷程)이다. 그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어머니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기 때문에, 어머니 됨을 포기할 서원을 주님께 했다.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장차 어머니 되기를 포기해야 하는 한나의 상황이 바로 모로역정이다.

 

2. 사무엘상은 “엘가나”라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사무엘서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다. 성경기자는 그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그리고 그의 직계 조상들이 누구인지를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런 다음 그의 두 아내를 소개한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사무엘상 1:2). 이것은 당시 사람, 특히 여자를 평가하는 데 출산여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3. 성경기자는 엘가나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21절을 보면, 매년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렸다)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제물 드리고 남은 것을 두 아내와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는데,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것의 갑절을 한나에게 준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엘가나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런 양상은 야곱과 그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을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훨씬 더 사랑하는데, 라헬은 자식을 출산하지 못해서 힘겨워 했다.

 

4. 그런데 문제는 자식이 여럿인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사무엘상 1:6). 자식을 화살 통 속 화살에 비유한 시편기자가 문득 떠오른다. 그런데 개역개정 본분을 찬찬히 보면, “브닌나”라는 이름을 작은 글씨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실제로 “브닌나”가 없는데, 개역개정 번역자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브닌나를 표기하는 것이 문맥을 파악하는 데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그의 적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이다. 적수. 이것은 브닌나가 한나를 어떻게 대했으며, 한나가 브닌나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5. 그런데 7절을 보면,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린 다음, 한나와 브닌나에게 제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한나와 브닌나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렇다면 엘가나 혼자서 실로에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9절, 즉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라는 구절이 입증해 준다.

 

6. 그렇다면 브닌나와 한나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든 것은 엘가나일 가능성이 크다. 브닌나는 자녀들도 있는데, 엘가나가 자신에게 주는 것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가나도 야곱만큼 철딱서니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두 아내 사이에 발생한 불화가 전적으로 엘가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불화를 조장하고 방치한 상당한 책임을 엘가나가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7. 엘가나는 억울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는 한나를 달랜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흥미롭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사무엘상 1:8).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장면이다. 그 다음 구절이 독특하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엘가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열 아들보다 낫다”는 구절은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룻기 4:15)를 떠올리게 한다. 엘가나는 한나가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게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텐데, 자신을 열 아들과 대비함으로써, 그를 한나에게 남편이 아니라 아들 위치에 놓는다.

 

8. 그들이 실로에서 식사를 한 다음, 다른 사람들은 숙소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한나는 성소에 남아서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사무엘상 1:10-11). 한나가 통곡했다는데, 13절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던 제사장 엘리가 한나의 입을 한참 동안 주목했다(12절). 그러니까 소리 없는 통곡이었던 것이다. 하도 괴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9.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절)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나는 “주의 여종”을 세 차례 반복한다. 한나는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면 아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겠단다. 주님이 한나를 어머니가 되게 하시면, 한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머니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한번이라도 아이를 낳아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10. 한나는 엘리와 대화를 나눈다. 엘리는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한나가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고 한나를 야단친다. 한나는 자신이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고, “마음이 슬픈 여자”여서 주님께 자신의 심정을 쏟아 놓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16절)라고 사연을 엘리에게 들려준다. 엘리는 한나가 하는 말을 듣고, 한나를 이해하고, 한나가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다. 엘 리가 하는 말을 듣고,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한나는 정말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브닌나가 자신을 격동케 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생활했다. 한나는 자신이 어머니가 될 것임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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