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가난한 노래의 씨

by 한종호 2015. 8. 24.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9)

 

가난한 노래의 씨

 

 

육사(陸史)의 본명은 “원록”입니다. 그의 필명이 성을 포함하여 “이육사”가 된 까닭은 1925년 중국에서 항일 독립단체인 <의열단>의 일원으로 국내에 잠입,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구금되었을 때 수감번호가 264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29년 출옥 후, 중국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난 뒤 1933년 국, 십년 뒤인 1943년 다시 서울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북경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삶의 경로를 보면, 그의 시에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필명이 육사, 즉 “대륙의 역사”라는 뜻을 가진 이답게 그의 시는 광활한 대륙의 기상과 민족적 혼의 웅대함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사는 식민지 조선의 반도적 한계에 갇혀 있지 않고 그의 시야를 드넓은 역사의 공간을 향해 집중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그의 시 <광야>는 태고(太古)의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한 휘몰아치는 기운을 지금으로부터 아득한 시간에 탄생한 설화(說話)처럼 뿜어내고 있습니다. 시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이 서 있는 “광야”는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현실을 뚫고 나가려는 모든 의지가 도달하고자하는 영토를 향해 육사는 그 어떤 제약에도 묶이지 않고 성큼 발을 옮깁니다. 첫 하늘이 드러나고 산맥이 요동치면서 지각을 뒤엎어나갈 때에도 시인이 마음에 키운 꿈의 자리는 여전히 자신만의 성역(聖域)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건 누군가 손을 대어 부정을 타게 하든지 또는 훼손시킬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없었던 강의 길이 열리고 계절이 쉴 사이 없이 자기의 색깔을 지우기 불가능한 흔적처럼 산하(山河)에 새겨놓고 난 뒤에도 시인은 그 광야로 가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그득한 시간에도 그는 자신의 고독한 여정을 결코 외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육사”라는 그의 이름을 뒤집어 해석해보면 나오는 “역사의 대륙”에 대한 그의 희망은, 서산에 해가 진다고 그와 함께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시대가 돌아보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 노래일지언정 부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걸 그는 스스로 “가난한 노래의 씨”라고 하지만, 그건 결코 빈곤한 음색이 아니며 어설픈 가사가 아닙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이 벅차지고 영혼이 맑아지며 희망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그런 생기 넘치는 가락인 것입니다.

 

그 까닭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는 기력으로 자신과 시대를 버티고 섰던 존재의 정신적 내공이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는 혹 자신의 노래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고, 인기를 모으지 못하며 또한 버려짐을 당한다 해도 쉽사리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 때가, 그는 살아생전 상상할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천고의 시간을 넘어 온다하여도, 시인은 그 어떤 마음이 깨끗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자신이 남겨둔 씨앗을 열매로 거두어 광야를 뒤흔드는 절창을 부를 것을 격정적으로 꿈꿉니다.

 

그렇지요, 남기고 간 것이 있으니 그걸 이어 뒤따라갈 이도 생기는 법이거늘, 지금 초라하다고 여겨 아예 씨를 뿌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광야에서 누가 주인이 되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인지 그때 가서는 더더욱 막막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 한 마디가 어느 날 내가 알지 못할 그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시작이 될 수 있다면, 그 노래 소리가 들리는 그곳은 더 이상 쓸쓸한 광야가 아니라 희망이 태어나는 소중한 현장이 될 것입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