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고 놀라운 일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8)

 

기괴하고 놀라운 일

 

 

“이 땅에 기괴(奇怪)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先知者)들은 거짓을 예언(豫言)하며 제사장(祭司長)들은 자기(自己) 권력(權力)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百姓)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結局)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오래 전의 일이다.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 내가 속한 지방에서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지방연합성회’라는 것을 열었다. 지방 내에 있는 모든 교회의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다. 그 때마다 외부에서 강사 한 명씩을 초대하였다.

 

어느 핸가 집회 중 사회를 맡은 적이 있다. 강사는 설교를 시작하며 뜬금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례비가 얼마인데(입이 벌어질 액수를 서슴없이 강조하며 말했다), 사례비보다도 다른 항목의 수입이 더 많다, 자신이 어디를 간다고 하면 교인들이 잘 다녀오라며 봉투를 넉넉히 챙겨 준다(이번에 올 때도 그랬다고 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몇 십 평이고(대가족이 살아도 공간이 남겠다 싶었다), 자동차도 최고급이고(아, 그러고 보니 주차장에는 유난히 번쩍거리던 덩치 큰 차가 있었다), 지금 넥타이에 꽂고 있는 넥타이핀에 박힌 다이아가 얼마짜리….

 

이야기를 들으며 하필이면 이 시간에 내가 왜 사회를 맡았을까,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제단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민망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예가 아니라 해도 자리를 박차고 이 자리를 떠날까, 그런 마음과 씨름을 하느라 더 이상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믿음 생활 잘하면 자기처럼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담임 목사에게도 자기가 대접 받는 것처럼 잘 하라는 뜻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엉뚱한 모습이 떠올랐다. 개구리를 잡아 양쪽 다리를 벌리며 개구리의 다리를 찢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장난삼아 다리를 찢을지 몰라도 개구리에겐 생사가 달린 일,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교우들 앞에서 지금 강사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기괴(奇怪)하다는 말이 기괴하게 들린다. 기이할 기(奇)에 기이할 괴(怪)가 만나 뜻 하나를 강조한다. 기이하고 괴상한 일, 보통과 다르게 유별나고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새번역)

“이 땅에는 기막힌 일, 놀라 기절할 일뿐이다.”(공동번역)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일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다.”(성경)

 

주님이 보시기에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하고 놀라운 일, 기가 막혀 기절할 일,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일은 무엇일까?

 

선지자들이 거짓으로 예언을 한다. 주님의 말인 양 거짓말을 전한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예레미야 14:14, 새번역)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린다. 제멋대로 가르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居民)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田地)와 아내가 타인(他人)의 소유(所有)로 이전(移轉)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者)로부터 큰 자(者)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先知者)로부터 제사장(祭司長)까지 다 거짓을 행(行)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百姓)의 상처(傷處)를 심상(尋常)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平康)하다, 평강(平康)하다 하나 평강(平康)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可憎)한 일을 행(行)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者)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罰) 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6:12~15).

 

하나님 백성이 입은 상처를 ‘심상히’ 여긴다는 것은 하찮게,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들은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 아예 염치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아프고 불쌍한 것은 백성들이다.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제사장들이 내세우는 권위를 좋아한다. 선지자들의 거짓과 제사장들의 권위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한 타협일 수 있다.

 

그런 백성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 예언을 들은 이 백성도 기근과 전쟁에 시달리다가 죽어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던져질 것이며, 그들을 묻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예레미야 14:16)

 

분명히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의 일이다.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이고 남의 나라 일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일이 도무지 과거의 일로 읽히지가 않는다. 남의 일이라 여겨지지도 않는다. 오늘 이 땅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피할 길이 없는 생생한 일이다.

 

뾰족한 대 끝에 서듯 일점일획도 보태거나 빼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일을 두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말이다.

 

“예언자들은 나의 말인 양 거짓말을 전하고, 사제들은 제멋대로 가르치는데, 내 백성은 도리어 그것이 좋다고 하니, 그러다가 끝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려느냐?”(31절, 공동번역)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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