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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고삐 풀린 망아지들

by 한종호 2015. 7. 27.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6)

 

고삐 풀린 망아지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卑賤)하고 우준(愚蠢)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自己)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귀인(貴人)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自己)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一齊)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結縛)을 끊은지라”(예레미야 5:4~5).

 

어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알면서도) 하나님을 등질 수가 있는 것일까, 예레미야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 법’(이사야 1:3)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짐승만도 못하단 말인가?

 

내남없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사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예레미야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다. 혹시 주님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비천하고 우준하기 때문 아닐까? 가난하니까 먹고 살기 바빠 주님의 길을 살필 겨를이 없고, 무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것 아닐까?

 

우준’(愚蠢)이란 말은 오늘 우리에겐 낯설다. ‘어리석을 우’()꿈틀거릴 준’()이 합해진 말인데, ‘꿈틀거릴 준’()이라는 글자가 재미있다. 밑에 있는 벌레 곤’()과 윗부분의 봄 춘’()으로 구성되어 있다.

 

’()벌레’()나 새들이 알을 낳아 부화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유충이나 어린 새끼는 꿈틀거리면서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 중에는 부화 직전 어수선한 소리로 번잡스럽게 울면서 부리로 껍질을 쪼아대는데, 그러면 어미가 동시에 껍질을 쪼아 주는 줄탁동시’(啐啄同時)를 통해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 속에 정해진 이치나 어미를 따르지 않는 새끼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기도 한다.

 

우준이란 말을 어리석음 속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짓으로 이해를 하면 우준한 생각일까? 아무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유를 비천과 우준에서 찾으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다. 가난하고 어리석어 그런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예레미야는 기대를 가지고 귀인’(貴人)을 찾아간다.

 

사전에서는 귀인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이라 풀고 있다. ‘귀인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비천하고 우준한 사람하고는 정반대가 되는 이들이다. ‘귀인<새번역>에서는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 <공동번역>지도층으로, <성경>어르신들로 옮겼다.

 

 

그들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지도층인 어른들은 다르지 않을까, 예레미야에겐 그런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기대와는 달리 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5, 새번역),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한 끈을 끊어버린 자들이었다.

 

멍에와 결박한 끈은 생각하기에 따라 구속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끈이 되기도 한다.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속박이 되기도 하거니와, 둘을 하나로 묶어주고 이어주는 연결고리도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었다.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자 방식이었다. 결코 짐이 아니고, 부담이 아니고, 구속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겨 그것을 모두 끊어버리고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천한 이들이나 귀인이나 모두가 어리석음 속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준한 사람들, 허다한 교인들로부터 내로라하는 종교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뿐이니, 고삐 풀린 망아지 귀에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하여 줄 수가 있겠느냐?”(7)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이 어찌 들릴꼬!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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