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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

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1)

by 한종호 2015. 5. 15.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8)

 

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1)

 

 

1. 다말이라는 한 여인. 성경기자는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한다. 다말 이야기를 하는 창세기 38장은 37장에서 시작한 요셉 이야기를 느닷없이 끊고 들어오는데, 이렇게 끊긴 요셉 이야기는 39장부터 다시 시작해서 50장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창세기 37-50장이 요셉 이야기인데, 38장은 그 흐름을 깨뜨리는 침입자라는 것이다. 37장에 다말 이야기를 하고 38-50장을 요셉 이야기로 하는 것이 깔끔해 보이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치했다면, 요셉 이야기를 끊고 다말 이야기가 들어오는 그 돌발성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까지 하면서 성경기자가 다말 이야기를 하려했을까?

 

2.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텍스트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37장은 요셉이 애굽에 팔린 이야기를 끝난다(36절). 그런데 마지막 문단인 29-35절은 르우벤이 요셉 때문에 슬퍼하고, 야곱이 애통해 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4-35절).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긴 야곱, 그 모습이 성경기자로 하여금 두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겼을 유다를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3. 창세기 38장을 다말 이야기라고 했는데, 얼핏 보면 유다 이야기로 보인다. 유다는 형제들과 떨어져서 살았단다. 아둘람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수아의 딸은 세 아들을 낳았다. 엘, 오난, 셀라. 아이들 이름은 유다가 지었다. 성경기자는 이렇게 유다가 아이들을 낳으면서 유다 가문을 형성해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4. 그렇게 유다가 아이들을 낳고, 꽤 시간이 흘러서 장남 엘이 장가가야할 때가 되었다. 유다가 며느리를 골라서 데려왔다. 유다 계보가 이어지는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직 젊은 엘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다말이 아직 출산은커녕 임신도 못한 상태에서 엘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엘이 급작스럽게 죽은 까닭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라고 한다.

 

5. 엘이 어떤 행위를 했기에 성경기자가 그렇게 평가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기자가 그렇게 평가하는 것을 보면, 엘이 상당히 비참하게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궤를 운반하던 과정에서 웃사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베레스 웃사 사건처럼, 엘도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엘이 그렇게 죽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피부암으로 고통당하는 욥을 찾아와서, 욥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험악한 병을 앓는다는 것은 욥이 그런 벌을 받을 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다는 증거라고 몰아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Tamar og Juda, maleri av Jacopo Bassano, ca 1550. Wikimedia Commons.>

 

6. 엘은 죽었지만 아직 오난과 셀라가 남아 있다. 셀라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안 되었고, 오난은 결혼할 나이가 된 것은 분명한데,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유다는 그 당시 관습에 따라서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 다말과 동침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엘의 대를 잇게 하라고 말한다.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문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세기 38:8). 이것은 죽은 이의 대를 잇게 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여인을 어머니로 만들어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 오난은 그 관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난은 그 관습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오난이 다말과 동침해서 다말이 낳는 아이는 생물학적으로는 오난의 아이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오난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말이 낳는 아니는 엘의 아들로 입적해야 했다. 오난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관습에 반기를 든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오난은 그 관습을 따라서 다말과 동침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 본능에 반하는 매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성교를 하다가 사정하는 순간 오난은 정액을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창세기 38:9). 쉽지 않은 일인데, 오난이 얼마나 독하게 마음먹었는지 알 수 있다.

 

8. 사람들이 이런 내밀한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유다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다말이 임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다말이 임신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자초지종을 캐물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일이 드러났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유다는 매우 진노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난이 갑자기 죽임을 당한다. 이 죽음도 엘의 죽음만큼 처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라고 평가한다(창세기 38:10).

 

9. 다말과 동침한 두 아들이 연이어 죽는 것을 보고 유다는 불안하고 두려워졌을 것이다. 다말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창세기 38:11).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셀라로 하여금 다말과 동침하게 했을 때, 엘이나 오난처럼 셀라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가 끊기는 끔찍한 일이다. 대를 잇기 위해서 한 일이 오히려 대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 엘과 오난이 비극적으로 죽으면서, 다말은 남편을 잡아먹는 여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참 기구한 삶이다. 자신과 동침한 남자들, 그것도 형제가 연이어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다말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엘과 오난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말은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 유다는 과연 가문의 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다말은 과연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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