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사상초유의 독재타도

김삼웅의 광복 70년 역사 키워드 70(19)

 

4월 혁명, 사상초유의 독재타도

 

 

우리나라 역사는 왕조창업, 반정 반란, 민란, 쿠데타, 유신 등 여러 가지 정치 변혁이 있었으나 ‘성공한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 전봉준의 동학혁명과 1919년 3ㆍ1혁명은 좌절된 혁명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민중이 최초로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1960년 4월의 민주혁명은 3 ㆍ15부정선거로부터 발화되었다. 마산에서 일기 시작한 부정선거 규탄의 시민ㆍ학생시위는 쉽게 서울과 부산ㆍ대구ㆍ광주ㆍ목포ㆍ청주 등 대도시로 번졌다.

 

2월 28일 당국이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조치한 데 반발하여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을 기점으로 하여 주요도시의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앞장섰다.

 

김주열의 시체인양으로 마산의 2차 시위가 4월 11일에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다시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의 고대생 시위는 구호를 부정선거에서 독재타도로 바꾸어놓았고, 이튿날인 4월 19일을 기해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총궐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고교ㆍ대학생을 비롯해,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의 일부가 경무대로 향하는 한편,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ㆍ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 명의 시민ㆍ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의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서울에서만 이날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ㆍ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정권 유지를 꾀했다. 그러나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ㆍ15부정선거와 4ㆍ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4ㆍ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ㆍ25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ㆍ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새로 임명된 외무장관 허정, 계엄사령관 송요찬과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대통령은 4월 26일 오전 10시를 기해 발표된 하야성명을 통해,

 

1. 국민들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ㆍ15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3.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하겠다.

4. 선거로 인한 모든 불만스러운 점을 없애기 위하여 이기붕 의장을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대통령의 전격적인 하야성명이 발표되기 직전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26일 아침부터 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데모를 벌이고 있던 시위군중 속에서 5명의 대표를 골라 이승만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송요찬은 이날 아침 데모군중들에 의해 탑골공원에 있던 이 박사의 동상이 파괴되고, 그 동상의 목에다 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으며, 수십만의 군중이 경무대 어귀에 집결하는 것을 보고 이승만의 하야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 무렵 사태수습을 협의 중에 있던 국회는 3ㆍ15선거의 무효화 선언과 내각책임제의 개등을 수습방안으로 채택했다가 이 대통령의 하야소식이 발표되자 긴급회의를 소집, 이 대통령의 사임권고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회의 결의가 전달되자 이 대통령은 4월 27일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이로써 이승만의 12년 독재 통치는 종식되고, 그는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곧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되고, 4ㆍ19혁명에 의해 두 번째 탄핵당한, 부끄러운 정치인이었다.

 

4ㆍ19혁명은 몇 갈래의 역사적 의지가 접목되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는 동학혁명의 맥박이요, 다른 하나는 3ㆍ1혁명의 혼이다. 황토현에서 찢긴 민중의 혼이, 탑골공원에서 산화된 독립의 의지가 4ㆍ19에 접목되어 벽혈로 발휘되었다. 때문에 4ㆍ19의 의의를 단순 도식의 정치변혁운동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첫째, 계층ㆍ신분ㆍ지역ㆍ성별의 구분 없이 민중이 하나가 되어 일으킨 국민혁명.

둘째, 외세는 물론 특정 정치집단의 조종이 아닌 민중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주체혁명.

셋째, 반공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북대화를 제의하는 민족통일정신.

넷째, 매판자본ㆍ원조물자 착복 등 전근대적인 경제질서 타파하고 산업의 근대화 제시.

다섯째, 전근대적 신민의식에서 근대적 시민의식을 고취한 시민정신.

여섯째, 정체된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신생활운동.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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