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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반독재의 신호탄 2ㆍ28대구학생봉기

by 한종호 2015. 4. 28.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20)

 

반독재의 신호탄 2ㆍ28대구학생봉기

 

 

1950년대 한국은 전쟁과 전후의 황폐한 국토, 이승만 정권의 폭정으로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은 암담한 시기였다. 이런 속에서도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해 정치적 폭주를 자행하고 있었다.

 

1960년 봄으로 예정된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무소불위,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했다면 이승만은 경찰을 앞세웠다.

 

기성세대들은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로 비판과 저항정신을 잃고 현실순응적인 ‘순한 양’이 되었다. 이승만 시대의 경찰은 일제강점기의 순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국민들은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가히 법위에 군림하였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유행어가 나돌만큼 국민들은 침묵이 강요되었다. 민주주의는 허울뿐이고 경찰국가체제로 국가가 운영되었다.

 

3ㆍ15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4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서는 특별한 선거전략을 짰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28일로 예정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장에 정치에 민감한 고등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책에 부심했다. 그 결과 시내 고등학교장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일요일에 등교시킬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경북고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등의 명목으로 28일 일요일 등교지시를 내렸다. 하나 같이 예정에 없던 일들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적 위난이 닥칠 때이면 가장 먼저 구국의 전열에 나선 것은 청년ㆍ학생들이었다. 1919년 도쿄 2ㆍ8독립선언이 고렇고, 3ㆍ1혁명도 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1919년 중국 지린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의 핵심멤버들도 청년들이었다.

 

자유당 경북도당이 학교장들에게 일요일 등교의 지침을 내린 사실을 알게 된 경북고ㆍ대구고ㆍ경북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25일 밤부터 비밀회합을 갖고 일요일에 등교하여 항의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 정권이 전국의 학생들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묶기 위해 조직한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반독재 첫 봉화를 올린 것은 경북고생들이었다. 2월 28일 낮 12시 50분 교내 운동장에 모인 800여 명의 학생들은 준비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대구시내 중심가로 행진했다.

 

대구고등학생 200여 명도 오후 2시경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를 벌이고 경북여고생 100여 명도 시위에 참여했다. 경북사대부고생들은 교사들이 시위를 눈치 채고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어서 오후 늦게 시위에 나섰다. 이외에도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농업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등이다.

 

 


<출처: 2.28 민주운동기념사업 50년, 2010>

 

학생들은 시위에 나서기 전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밝혔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린 학도(⋯)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회침을 들어주려는가?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학생대표에 의해 ‘결의문’이 낭독되자 학생들은 의기에 넘쳐 박수와 환호성으로 답례하고, 시내로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암울했던 회색의 시대를 떨치고 학생혁명의 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대구고등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대해 대구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북고등학교에서는 전체 학생들에게 극장단체관람을 위해 일요일인 2월 28일 하오 1시까지 등교할 것을 지시했다. 28일 상오 12시 50분까지 학교에 나왔던 2백여 명의 학생 앞에서 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 군이 공휴일에도 등교시키는 폐습을 시정하자고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일요일에 등교시킨 학교 당국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2백여 학생은 이 선동에 호응하여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경찰측의 종용으로 해산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다”(<대구매일신문>, 1960. 2. 28).

 

경찰은 이날 저녁 7시 40분경 학생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학생 30여 명 등 300여 명을 연행 했다. 연행된 학생간부들에게 경찰은 폭행하면서 배후를 캐묻고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시위 확대를 우려한 자유당 중앙당의 지시로 모두 석방하였다.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이 켜든 횃불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민주당 선거강연이 끝난 후 강연회에 참석했던 1,000여 명이 “학생들은 궐기하라”, “공명선거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3월 8일에는 대전고학생 1,000여 명, 3월 10일에는 대전상고생 300여 명, 수원농고생 300여 명, 충주고생 300여 명, 3월 12일 부산해동고생ㆍ청주고생, 3월 13일 오산고생 100여 명, 3월 14일 원주농고생ㆍ부산의 동래고생ㆍ부산상고생ㆍ항도고생ㆍ테레사여고생ㆍ포항고생, 서울의 중동고생ㆍ배제고생ㆍ대동고생ㆍ보인상고생, 인천의 송도고생 등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3월 13일 서울의 고등학생들은 시내 시공관 앞ㆍ미도파ㆍ반도호텔ㆍ시청ㆍ국제극장 등까지 진출하여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공명선거를 요구하고,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민주당원 30여 명이 시위한데 이어 곧 마산시청 앞에서 시민 1만여 명이 행진하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3ㆍ15의거가 진행되었다.

 

대구 2ㆍ28 학생 시위로 촉발된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이어서 마산의거, 4ㆍ19혁명으로 이어졌다. 2ㆍ18학생 의거는 단순히 일요등교 지시에 대한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위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눈앞에서 벌어진 선거부정과 각종 사회악에 침묵하자 의로운 젊은 혈기로써 시대정신을 갖고 궐기한 것이다.

 

2ㆍ28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의의는 선도성(先導性)에 있다고 할 것이다. 2ㆍ28은 식민통치, 미군정, 분단국가의 수립, 한국전쟁, 이승만 권위주의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효능’에 회의적 태도를 내면화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2ㆍ28은 냉전체제와 분단체제를 기초로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이승만정권에 저항을 시작함으로써 체념적 순종 상태에 있던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부 수립 이후 민주운동을 선도함으로써 2ㆍ28은 4월혁명의 횃불을 밝혔다. (김태일,<4월혁명의 출발 - 2ㆍ28 대구민주운동의 정치사적 의의>)

 

대구 2ㆍ28시위 반세기도 더 지난 2015년 초 대구 교육당국이 시내 고등학생들을 특정 영화 무료관람을 시켜서 물의를 일으켰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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