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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작고 하찮을수록 소중한 이야기들

by 한종호 2021. 12. 19.

 


<제가 새댁 때 일이었어요. 어느 날인가 기름을 짜러 개치로 나갔지요, 마을에도 기름 짜는 방앗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개치에서 짜면 기름 한 종지가 더 나온다기에 그 한 종지 바라고 어린 아들과 함께 개치로 간 거예요.


기름을 짜 가지고 돌아오는데 뉘엿뉘엿 해가 졌어요. 그때만 해도 차도 드물었구 천상 개치까진 걸어갔다 걸어오는 길밖엔 없었어요. 이십 리 길이었지요. 해가 지자마자 이내 어둠이 이부자리 깔듯 깔려드는 거예요.


무섭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 차려야 할 저녁상도 있어 서둘러 걸었어요. 그치만 한손으로 아들 손잡고 한손으로 머리에 인 기름 담은 질방구리를 붙잡았으니 걸음이 빠를 수가 있었겠어요?


그때 마침, 뒤편에서 환한 불빛이 비춰와 바라보니 자동차가 오고 있는 거였어요. 그걸 본 아들이 “엄마, 차 태워 달라 해서 타구 가자.” 졸랐어요. 먼 길 걷느라 힘이 들었던 거지요.


아들을 봐선 그러구 싶었지만 기름을 질방구리에 담았거든요 포장도 안 된 길인데 그걸 갖고 차를 타면 기름이 쏟아질게 뻔했지요.


그런 얘길 아들에게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달려온 자동차가 ‘빵!’하고 경적을 울리며 우리 곁을 휙 지나간 거예요. 갑작스런 경적 소리에 기겁을 하고 놀랬는데, 아 그만, 그 때문에 이고 있던 질방구리를 놓치고 말았어요. 질방구리가 땅에 떨어져 와장창 깨진 건 당연한 일이지요.


순간 앞이 캄캄해지데요. 다리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걸 겨우 참고 주섬주섬 깨진 질방구리 조각들을 주워 모아 집으로 왔어요.
집에 와 깨진 질방구리에 묻어있는 기름을 모두 따라 담아보니 그게 꼭 한 종지더라구요.


그걸 본 남편이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까지 나가더니 겨우 한 종지 건졌구랴.” 하며 껄껄 웃는 거예요.

 

그런 남편의 웃음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

장에 다녀오는 길, 단강으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이웃마을 한 아주머니의 얘기를 이필로 속장님이 했습니다.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부론)까지 갔다가 결국은 한 종지만 얻게 됐다는 얘기에 우린 한참 웃었습니다.


다시 이어진 얘기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주머니 옆 자리에서 아주머니 얘길 듣던 한 중년 남자가 그 얘길 듣더니만


“아 그거 참 재미난 얘기네요. 아주머니, 그 얘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길 글로 쓰면 좋은 글감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음이 다시 터졌던 건 그 중년 남자 얘길 하던 속장님이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또 있드라구요, 글쎄.” 하고 얘길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헛간에 걸어놓은 못쓰게 된 살림살이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싶은 당신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그 얘기를 시시콜콜 글로 남기는 목사. 꽤나 할 일이 없나 부다 싶었던 처음과는 달리, 교우들은 목사를 통해 다시 듣게 되는 당신들의 얘기를 이제쯤엔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 이야긴 미미하다 할지라도 함께 사는 이들 가슴에 생의 메아리 되어 돌아감을 나도 압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요.


하찮다 하지만 결코 하찮지 않은, 작고 하찮을수록 소중한 이야기들. 흙냄새 가득한 얘기 속에 담겨있는 생의 온기와 향기들, 내가 단강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위선일지 몰라도 단강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함은 한줌 진실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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