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부 이승만’의 반민족ㆍ반민주행적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0)

‘독부 이승만’의 반민족ㆍ반민주행적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정부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하여 그의 집권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의 독재가 절정을 이루던 자유당 말기, 절세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은〈이승만 대통령 하야 촉구 공개장>에서 ‘독부(獨夫) 이승만’이라 지적했다. ‘독부’란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를 말한다.

이승만은 독부였다. 자유당 말기뿐만 아니라 미국 망명기나 귀국하여 단독정부를 세우고, 12년 동안 1인 독재 권력을 유지할 때까지 다르지 않았다. 독재ㆍ독부ㆍ독선ㆍ독점 등 그에게는 홀로 독(獨) 자가 유독이 많았다.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분장된 그의 망명기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보수 세력이 ‘건대통령’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승만의 해방 전후의 행적이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지, 집권기간의 1인 전제가 어떻게 독부의 길이고, 얼마나 반민족, 비민주적이었는가를 각종 자료를 통해 살펴본다.

 

 

여기서는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전부 취급할 수는 없고,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진 부일행적과 독립운동으로 분칠된 내용을, 그리고 비민주적인 행적을 요약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1) 1899년 1월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반정부투쟁을 벌이다 구속돼 서소문 감옥에 갇힌 이승만은 탈옥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무기형으로 감형돼 1904년 8월 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지원으로 5년 7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 기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고, 많은 독서를 하면서《독립정신》등을 저술하고 80여 편의 논설을 썼다.

(2) 출감하여 상동교회 부설 청년상동학원의 교장(3주)을 지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에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의 출국을 주선한 사람은 친일파로 소문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였다. 이승만은 총독부가 발급해준 여권으로 고국을 떠났다. 이때 민영환ㆍ한규설이 미국정부에 보내는 밀서를 지참했다.

(3) 워싱턴에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민영환ㆍ한규설의 밀서를 전하고 한ㆍ미수호조약의 이행을 촉구한데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루스벨트의 특사 테프트와 일본수상 가쓰라 비밀협정체결로 한국독립 보장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면담, 독립청원 등 미국 신문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청년지사’로 알려졌다. 당시 ‘일진회 대변인’이었다는 기사가 <뉴욕 데일리 트리분>(1905.8.4)에 게재됐다.

(4) 미국에 눌러앉아, 미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인문분야는 우수했으나 수학ㆍ경제학은 불량했다. 이어서 하버드대학 입학했고 미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목적으로 그가 종교지도자가 되길 원해 적극 지원했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1776년부터 1872년까지 미국이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던 전시중립을 다룬 내용이었다.

(5) 하버드 재학중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 교민들의 분노와 반이승만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후에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등 의열투쟁을 비판하기도 했다..

(6)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1910년 10월 5년 만에 귀국했다. 한국은 이해 8월 29일 일제에 병탄. 1912년 초까지 YMCA 학생부ㆍ종교부의 간사로 근무, 한국 체류 5년 동안 민족문제, 독립운동 관련은 외면했으며, 오히려 “반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발언하는 등 반일보다 해외유학을 권려했다.

(7) 총독부가 1912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신민회간부와 기독교 지도자 등 900여 명을 구속하고 이 중 105명을 기소하는 등 ‘105인 사건’의 와중에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해외 망명을 택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옥중에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네브라스카주 체스팅스의 소년병학교를 방문했다. 이 무렵 <워싱턴포스트>회견에서 “(병탄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YMCA에서 있다가 박용만의 주선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8) 당시 하와이에는 8천여 명의 교민이 살고 있었다. 교민들은 이승만이 ‘105인사건’을 피해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승만은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고, 잡지와 선전책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을 비판하여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교민사회가 분열되고, 대한민국민회의 주도권 싸움으로 대조선국민군병단의 박용만을 축출하면서 이때부터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이 대결하게 되었다. 트러블 메이커로 알려졌다.

(9) 1919년 초 제1차 대전 전승국들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스승인 윌슨 대통령의 면담도 좌절되었다. 강화회의에는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김규식이 참석했다.

(10) 정한경과 1919년 2월 25일〈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는데 “연합국 열강이 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에 두는 조처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측근 정한경은 국내의 3ㆍ1운동 뒤에도 미국 신문에 쓴〈한국의 호소〉(뉴욕타임즈)에서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다.

(11) 국내의 3ㆍ1혁명 소식을 듣고 3월 14일~16일까지 서재필ㆍ윤병구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가두시위,〈미국정부에 보내는 호소문〉등을 채택한다.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한성정부는 실체적 조직보다 ‘지상정부’의 성격이었다. 소수인들이 모여 구성했고 언론보도로 과대포장되었다. 여기서 그는 집정관총재에 추대되었다. 이 때문에 한성정부를 정통정부로 인식했다. 이후 집정관총재직을 대통령으로 행세한다.

(12)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선출, 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이 ‘위임통치론’을 들어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서 여전히 대통령으로 행세, 임정에서 시정을 촉구했으듣지 않았다. 1919년 8월 상하이임시정부가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정부와 통합하면서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제로 개편할 때까지 미국에서 대통령으로 부르며 행세했다.

(13) 1년 반 만에 상하이 임시정부에 도착, 정부운영 방안ㆍ항일투쟁 방책이 없어 임정 내분이 격화되었다.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이 임정과 결별했으며 이때 만주에서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등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은 현실성이 없는 외교론만 주장했다.

(14) 1921년 5월 29일 1년 반 만에 다시 임시정부를 떠나 미국행, 워싱턴 D. 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5) 1922년 2월 하와이로 귀환하여 이듬해 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 20명으로〈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 끝에 일본여권으로 한국을 방문케 했다. 명색이 임정 대통령의 신분으로 한 일이다. 이때 하와이의 한 강연에서는 청ㆍ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모범적이라 찬양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16)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2년 6월 17일 1주일간의 토론 끝에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승만 불신임안을 결의하여 정부수립 6년여 만에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었다.

(17)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10일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윤치영 등을 시켜 명맥을 유지하면서 임시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와이 체류 중에 한인사회 단체를 자기중심체제로 바꿔 교민사회가 분열했고, 대한인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이 ‘종신총재’에 추대되었다.

(18) 중ㆍ일전쟁의 발발로 국제정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1939년 10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구미위원부의 인정을 요구, 임시정부는 미ㆍ일 전쟁이 임박해지자 1941년 6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임정의 주 워싱턴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19) 미ㆍ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활동을 개시했다. 이승만과 한미협회는 1943년 3월 미 정부에 임시정부의 인정을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거부했다. 한인연합회 하와이지부 등 임정에 이승만의 소환을 요청했다. 이유는 교민 사회의 불화ㆍ분열을 주동한다는 것. 미 정부의 한국 임정 승인 거부에는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1944년 6월 주미외교위원부를 임시정부체제로 개편하려다 교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945년 2월 미 국무차관과 7월에는 트루만 미 대통령에게 전보로 임정의 승인을 요청했다.

(20) 1945년 7월 말 태평양전쟁을 이끌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ㆍ반공입장을 전달, 맥아더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일제의 항복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중경의 김구보다 먼저 귀국을 위해 맥아더 접촉에 성공했다. 그의 주선으로 9월 16일 군용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하지와 함께 귀국. 도쿄에서 맥아더ㆍ하지와 한국문제에 대해 요담. 미군장교 복장으로 귀국했다(윤치영 증언).

(21) 귀국 뒤 “나는 공산당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매일신문. 45. 10. 26)라며 공산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공산당 불법조치로 극렬 반공주의자로 다시 선회했다.

(22)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으로 단정수립을 처음으로 주장하고, 김구ㆍ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을 반대했다. 46년 말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로 미국에 건너가〈남한 단독정부 수립안〉6개항을 제시하고, 미국의 반소 정책을 촉구하는 등 대미활동을 한다.

(23) 1948년 5·10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봉쇄했는데, 6ㆍ25전쟁기에 내란음모 협의로 총살형을 내려 정치보복 제1호 희생자가 되었다. 철학부재ㆍ정책부재의 비판을 피하고자 ‘일민주의’를 내걸고 국민을 일원체제로 묶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24) 제주 4ㆍ3항쟁이 일어나자 계엄법률을 제정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회의에서 “강력히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로 2만 5천~3만 명의 희생자 발생하였다. 제주 4ㆍ3항쟁, 여순사건 등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악용하기도 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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