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악보가 웬수다!”

by 한종호 2015. 2. 9.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6)

“악보가 웬수다!”

30여 년을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면서 대원들에게 악보 읽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저는 나쁜 지휘자였습니다. 대원들에게 악보 읽는 능력을 키워줬다면 연습 시간이 대폭 줄었을 텐데 그런 노력은 안 하고 환경 탓만 했던 것입니다. 대원들이 거의 외울 정도로 연습을 하고도 악보를 손에 놓지 못하는 것이, 악보를 못 읽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악보가 웬수다!”

성가대 연습을 시키면서 입에 달고 살았던 말입니다. 예배 시간은 다가오는데 대원들이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는 악보를 빼앗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거의 외워 놓고도 악보에서 눈을 못 떼는 대원들을 보며 속이 터졌던 겁니다.

악보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지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내는 소리의 음정이 떨어졌는지 아닌지 여부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파트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템포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 정도면 주인은 악보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악보에 무릎을 꿇고 노예로 전락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악보 체계, 즉 기보법은 17세기에 완성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음악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자 작곡가들은 서둘러 새로운 기보법을 고안했습니다. 기존의 것으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음악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400-500년 동안 서양 음악이 가지고 있던 악보 체계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기보 체계로는 우리 국악이나 트로트는 고사하고 서양 음악도 제대로 악보에 표기하기에도 제약이 따릅니다. 만약 현재의 악보로 실제 음에 가깝게 기보를 한다면 악보가 너무 어려워져서 연주자들은 애를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기보법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악보가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은 다른 방법으로, 즉 해석을 통해 보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왈츠 리듬을 현재 악보 체계로 정확히 표기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왈츠에서 '꿍짝짝' 할 때의 세 박자 길이는 균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에 가깝게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처럼 쿵짝짝으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면 ‘꿍짝짝’을 똑 같은 길이로 연주하겠지요.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연주하면 왈츠의 본고장에서는 대번 ‘그건 왈츠가 아니’라고 그걸 겁니다. 유럽에서 왈츠란 첫 박자가 가장 길고, 두 번째 박자가 다음이고, 세 번째 박자가 가장 짧습니다. 그들은 수 백 년 동안 그렇게 연주해 왔습니다. 악보를 못 볼 리 없는 유럽 사람들이 왈츠를 그렇게 연주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왈츠를 나중에 악보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왈츠를 정확하게 연주하려면 유럽으로 가서 악보에 표기된 왈츠가 아니라 저들의 몸에 흐르는 왈츠를 경험해야 합니다. 유럽까지 갈 수 없다면 최소한 본 고장의 왈츠 음악이 몸에 체화될 때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양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왈츠가 쉽지 않습니다. 악보에 나타난 박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왈츠란 리듬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유럽 연주자들이 왈츠를 완벽하게 연주하기란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 사람이 우리말 을 완벽하게 발음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우리의 국악이나 트로트를 제대로 연주하는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악보 체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악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수밖에 없습니다. 악보란 작곡가가 생각한 음악을 부분적으로만 보여줄 뿐입니다. 실제 연주가 시작되면 악보는 연주자에게 자기가 내는 음정이 떨어지는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발음과 음색으로 노래하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 파트 소리가 너무 크거나 작아서 균형과 조화를 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영역은 결국 섬세하게 귀를 훈련시키거나 지휘자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습니다.

베스트 운전자가 되려면 교통 법규도 알아야 하고, 백미러를 보고, 적당한 타이밍에 브레이크를 밟는 운전 테크닉도 숙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운전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시야 확보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거리 상황을 눈으로 확인해야 사고나 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찬양이든 노래든 또는 기악 합주든 연주가 시작되면 대원들의 눈과 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좋은 귀를 훈련하고, 지휘자를 수시로 볼 수 있어야 사고나 나지 않습니다.

물론 연주자는 악보를 벗어날 자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보는 해석되어야 하고, 연주는 시시각각으로 변화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때에만 아름답습니다. 악보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고서 성가대가 한 차원 높아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악보를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악보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악보 때문에 달에 집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손가락을 포기해야 합니다. 악보가 찬양의 뿌리인 가사를 죽이고, 악보가 하모니를 깨뜨렸다면 찬양은커녕 좋은 음악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욱진과 슈베르트  (0) 2015.02.24
두 거장의 클래식 산책  (0) 2015.02.16
“악보에 머리를 처박지 말고”  (0) 2015.02.02
연주자들의 공공의 적, 암보  (0) 2015.01.29
나만의 명품  (1) 2015.01.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