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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몰랐던 길 하나

by 한종호 2017. 9. 14.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1)


몰랐던 길 하나


평화의 댐 정상에 있는 물 기념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 식당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는데, 메뉴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산천어가스였다. 화천은 세계적인 겨울축제로 자리 잡은 산천어축제가 유명한 곳, 산천어로 튀김을 한 요리였다. 화천에 왔으니 당연하다 싶은 마음으로 산천어가스를 택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식당에서 일하는 분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물었다. 화천까지 가려고 한다 하니 대답이 쉽다. 40분 정도 가면 될 걸요, 했다. 차가 아니라 걸어서 가려고 한다 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로드맵에는 댐 정상을 통해 대붕터널과 산과 산을 연결한 비수교, 재안터널을 통과하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있었다. 댐이 공사 중이서 댐 정상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댐 정상에서 점심으로 먹은 산천어가스. 당연하여 고민할 것이 없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 걸까.


그렇다고 평화의 댐 아래로 내려가 옛 길을 따라 걸으면 길이 멀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했다. 그 길로 가면 구불구불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데 평화의 댐에서 화천까지 족히 40km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해가 길다고 해도 점심을 먹고 떠나 저녁에 도착할 수는 없는 거리였다.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싶었다. 로드맵에는 버스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걷다 보면 북한강 상류를 안동철교로 통과하는 민통선 길을 달리는 마을버스를 만날 수도 있는데, 만약 버스를 만나면 그것은 횡재니 무조건 “accept!!”하라는 내용이었다.


버스에 대해 물어보니 직원 한 분이 친절하게도 몇 곳에 전화를 걸어 버스에 대해 알아봐 주었다. 하지만 기대를 걸었던 버스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버스는 늘 다니는 것이 아니었고 손님이 있을 때만 다니는데, 만약 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저녁 5시쯤에나 평화의 댐으로 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댐에서 길이 막히다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차 한 잔을 하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직원 한 사람이 다가와선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하면서 한 가지를 일러주었다. 민통선 입구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혹시 민통선을 지나다니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이따금씩 민통선을 지나가는 차가 있는데, 민통선을 통과하면 화천으로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에 화천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는 귀띔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는 반색을 하자 될지 안 될지는 저도 몰라요, 하는 것이었다.


인근에 있다는 민통선 검문소를 찾지 못해 같은 길을 서너 번 왔다 갔다 했다. 딱히 물을 사람도 보이지를 않았다. 마침내 검문소, 저만치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내 행색을 살피는 초병의 눈에서 빛이 난다.


걸어서 화천까지 민통선을 지나서 갈 수가 있는지를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투다. ‘민통선’(民統線)이란 말 그대로 ‘민간인통제선’(Civilian Control Line)이다. 민간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선 앞에 민간인이 서서 지나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 하며 혹시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살핀 군인 한 명이 잠깐 기다려보라 하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잠깐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통화를 마치고 다가온 군인은 내게 “신분증을 주시겠습니까?” 했다. “신분을 확인하고 차가 오면 같이 타고 지나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신분증을 받으면서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이나 댐을 공사하는 차들이 사전 허락을 받고는 왕래를 한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기다리며 초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1년부터 군 생활을 했으니 그들은 까마득한 후배들이었다. 아들 규민이도 지난해 제대를 했으니 아들 같기도 했다. 비상용으로 남긴 배낭의 초코바와 육포를 전해도 되는지를 묻자 규정상 안 된다며 사양을 했다.


만들어진 길을 걷기도 하지만, 걸으면 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길을 걷되 길을 만드는 사람, 부르심의 자리는 거기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있는데 언덕 위에 있는 막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쏟아지듯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함성과 구호 소리가 웃음 속에 이어지는 것을 보니 뭔가 행사를 갖고 있지 싶었다. 초병에게 물었더니 소대장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다고 했다. 함께 지내던 소대장을 떠나보내는 전별식을 하는 중이었다.


순서를 마쳤는지 소대장은 차를 타고 검문소 앞까지 왔고, 소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차를 뒤쫓아 달려왔다. 서로가 정이 많이 든 사이구나 싶었다. 하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이 외진 곳에서 함께 지냈으니 어찌 정이 들지 않을까, 어쩌면 서로가 형제 같을 터였다.


소대장의 차가 멈춰 서자 초병이 다가가선 하차를 명한다. 차에서 내리는 소대장을 보니 얼굴이 앳되다. 소대원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들이었다.


소대장이 차에서 내리자 초병 두 명이 자동차 안은 물론 차량 하체를 검사하는 도구를 끌고 다니며 사방으로 차량 검사를 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함께 지내던 사람을 떠나보내기 전 함께 지내며 늘 했던 일을 마지막 관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젊은이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다른 부대로 떠나가는 전별식은 웃음 속에서 이어졌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괜히 짠했다. 누군가를 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언제라도 마음을 짠하게 하는 법이다.


40 여분이 지났다 때 마침내 차가 다가왔다. 평화의 댐 쪽에서 레미콘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를 세운 초병들은 조금 전 소대장을 보낼 때처럼 차량 검사를 했고, 검사를 마친 뒤 기사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젊은 레미콘 기사는 선뜻 차에 타라고 했다.


레미콘의 높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높았다. 경사가 아찔했다. 자리에 앉으니 시야가 탁 트인다. 부산 쪽에서 일을 하러 왔다는, 선하게 생긴 젊은이가 운전하는 레미콘 차를 타고 민통선 안을 달렸다.


철조망 밖과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는 풍경과 공기,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새롭게 다가왔다. 민통선 안과 밖이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은 뭔지 모를 통증처럼 여겨졌다.


평화의 댐에서 화천까지 가는 길, 막혔던 길 하나가 그렇게 열렸다.


길이 있어 가기도 하지만, 가면 길이 되기도 한다.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길도 그렇게 열렸으면! 마음이 오가고 걸음이 오가며 몰랐던 길 하나 우리네 가슴 속에 화들짝 활짝 열렸으면!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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