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슈베르트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2015. 1. 6. 09:57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2)

미안, 슈베르트

베토벤 음악은 제게 그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베토벤 음악에 대해선 웬만한 찬사가 호들갑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6<전원> 교향곡은 예외입니다. <전원>은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과 달리 너무 단순하기 때문인지 재미가 없습니다. 때론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베토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명반을 여러 차례 찾아 들어보았지만 아직도 <전원>을 뜨겁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연주자나 교향악단에 따라 <전원>이 가끔 새롭게 들리긴 합니다. 그렇지만 <전원>은 다른 음악처럼 입을 벌리고 멍하게 몰입하게 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절로 아멘!’이 튀어나오듯 <전원>을 들으면서는 감탄했던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원>과는 끝내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 <그레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학창 시절엔 슈베르트의 <미완성>을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배웠습니다. <그레이트>는 슈베르트가 죽고 10년 만인 1838년에 슈만이 빈에서 발견하여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곡입니다. 이 교향곡의 초연은 당대 가장 뛰어난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음악 교과서들은 어쩌자고 이 곡이 초연되고 140여 년이 지나도록 <미완성>을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가르쳤던 것일까요.

<그레이트>는 슈베르트가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곡입니다. 그런데 초기 낭만파곡 치고는 러닝타임이 파격적입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60분대를 훌쩍 넘겼다는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슈베르트는 교향곡 전문 작곡가가 아니거든요. 그의 장기는 피아노 음악과 가곡이었습니다. 때문에 슈베르트가 60분이 넘는 러닝타임의 교향곡을 썼다는 건 놀랍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베르트 슈만이 <그레이트>천상의 길이를 지닌 빼어난 작품이라 흥분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교향곡도 제겐 좀처럼 재미가 없습니다. <그레이트>와 친해지려고 노력을 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걸 어쩝니까. 요즘도 가끔 듣긴 합니다. 슈베르트를 좋아하기에 들어주지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미안, 슈베르트!

 

지루하기로 치자면 브루크너도 못지않습니다. 그의 교향곡이 대단하다는 점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바흐, 멘델스존과 함께 가장 신앙과 음악과 삶이 일치했던 그를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제겐 없습니다. 저도 그의 교향곡의 심오한 느린 악장들은 참 좋습니다. 그럼에도 브루크너 음악은 제 입에서 살살 녹지 않습니다. 가슴을 흔들어놓거나 후벼 파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거의 일정한 템포로 유장하게 흐르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브루크너란 사람은 갈등이나 불안이나 절망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음악이 위대한 것도 알겠고, 기막힌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사한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악장만 넘어가면 제 집중도는 급격히 떨어집니다. 만약 말러란 음악가를 몰랐다면 어떻게든 브루크너에 정붙이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말러의 매력에 너무 깊숙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를 버리고 브루크너와 깊게 사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아직까진 말입니다.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은 지휘자들 가운데서도 말러와 브루크너 모두를 빼어나게 연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대개는 브루크너나 말러 중 한 사람만 전문 지휘자로 인정을 받지요.

어떤 음악가를 사랑하지만 그의 어떤 곡이 귀에 안 들어오면 괴롭습니다. 반대로 별로 선호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는 작곡가인데 뿌리치기 힘들 만큼 아름답게 느껴지는 곡을 만날 때도 힘듭니다. 그래서 죄짓듯 몰래 그런 음악을 들으며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재미를 모르면서 클래식 마니아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넌 어떻게 <전원><그레이트>가 재미없을 수가 있어?”라고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곡들이 좋지 않다니 네 수준을 알만 하구나라고 핀잔을 줘도 할 말은 없습니다. 뻔한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그 뒤의 진행이 눈에 보이고 지루한 걸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이런 음악들과 새롭게 만날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을 별로였다고 생각한 음악이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된 경험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추천한 명곡이라고 억지로 그 음악과 친해지려고 애를 쓰느니 그 시간에 좋아하는 음악을 한 번 더 듣기를 권합니다. 남을 위해 음악을 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까지야 없겠지요. 그렇더라도 음악 감상조차 자선사업처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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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초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2015. 1. 1. 04:08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1)

 

180

 

광화문에 있는 예술전용극장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일입니다. 광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영화가 시작되더군요. 중학교 때 단체 관람으로 극장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 이제까지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건 뭐지?” 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영화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일어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나싶더군요. 영화 시작과 끝에 일어났던 이 두 차례의 경험은 그날 본 영화만큼이나 또렷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문화컨벤션센터 콘서트홀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9번 연주가 있었습니다. 그 연주회에서도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저는 몰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작곡가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진 말러 교향곡 9번의 마지막 4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마침내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끝납니다. 말러는 마지막 마디의 피아니시시모 옆에 죽어가듯이’(ersterbend)이란 악상기호를 붙여놓았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3분 동안이나 손을 내리지 않고 정지해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물론 관객도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하고 지휘자를 기다렸습니다. 소리는 멈췄지만 3분이나 말러의 9번 교향곡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풍경과 지휘자가 아직 음악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박수를 쳐대는 일부 몰지각한 청중을 자주 목격했던 저로서는, 음악이 끝나고 10초나 30초도 아니고 3분 동안이나 콘서트홀에 소음 하나 없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아무리 연주가 압권이었더라도 관객이 1분이라도 지휘자를 기다려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클래식 음악의 본 고장이라고 하더라도 연주가 끝나고 3분 동안 콘서트홀이 정적에 휩싸이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날 현장에서 아바도 지휘의 말러 9번 교향곡을 들었던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숨 막히는 감동을 전해 준 사람은 영국 클래식 음악 평론가이자 얼마 전 번역된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의 저자 톰 서비스입니다. 그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우리 시대의 거장인 발레기 게르기예프, 마리스 얀손스, 조너선 노트, 사이먼 래틀, 이반 피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여러 번 참관하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톰 서비스는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을 실제 지휘한 경력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에 대해 이론과 실기를 겸한 평론가란 얘깁니다. 이 말을 하고 나니 우리 음악계에 대해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스포츠 평론을 하는 사람이 경기 룰을 모른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면 음악 평론가 역시 그러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악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준이 내 취향일 뿐인 평론가가 넘쳐난다는 얘깁니다. 톰 서비스의 이 책에 무게가 실리고 믿음이 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화장실에 갈 때만 야금야금 이 책을 읽었습니다.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이 보통 사람에겐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 시대 거장들의 리허설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이야기이고, 저자가 선정한 지휘자들이 하나 같이 좋은 연주자들이어서 너무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일에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저자가 주 독자층으로 상정하는 이들이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려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 그 이유입니다. 클래식과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나 흥미 있을 무대 뒷이야기이거든요. 따라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되 좀 더 깊고 짜릿한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의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음악적 취향과 클래식 이해의 깊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 책은 음악을 듣는 즐거움 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당신이 거기서 거기인 클래식 음악 에세이에 식상했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대안이 될 것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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