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을 그리워하는 까닭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5)

설산을 그리워하는 까닭

 

그 동안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대한大寒이 지났는데도 겨울답지 않게 날이 포근합니다. 몸을 옹송그리지 않아도 되니 좋기는 하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겨울을 빼앗긴 것 같은 이상한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나날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안나푸르나를 떠올리는 것은 후텁지근한 일상에 지쳤기 때문일 겁니다. 눈이 내리면 산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흰 눈에 덮인 산정은 시원의 신비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계곡에서 맞이하는 찬 바람은 제 느른한 일상을 내리치는 죽비입니다. 추위를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겨울 산을 참 좋아합니다. 잎을 떨 군 채 겨울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나무의 허허로움과 그 차가운 바위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일 겁니다. 아내와 겨울 산을 헤맬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가사를 쓴 <나무야 나무야>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다른 기억력은 부실하면서도 노래 가사만큼은 신묘할 만큼 잘 외우는 아내에게 가사를 자꾸 틀리게 부른다고 지청구를 듣곤 했습니다. 저는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로 불렀고,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로 불렀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대목을 늘 틀릴 수 있느냐는 책망에 그래도 일관성은 있지 않냐며 부르대다가 눈 흘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발목 수술을 받은 후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겨울 산행은 이제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아이젠 없이도 마치 제집 안마당을 걷듯 편안하게 산행하던 시절은 영겁의 저편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집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음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요구받는 일이 많아질수록 일에 쏟는 열정과 정성은 줄어들기만 합니다. 이러다가 구도의 길에서 일탈하여 피상성 속에 갇힌 수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정신이 아뜩해지기도 합니다. 며칠 전 프란체스코 교정의 필리핀 방문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딜 가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세상 어디서나 참 사람을 그리는 이들이 많다는 뜻일 겁니다. 교종은 마닐라에 있는 가톨릭 대학에서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살 소녀 글리젤레 팔로마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하더군요.

가정이 해체되어 길거리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교회가 마련한 시설에서 살고 있는 소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교종에게 물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과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신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지요?” 프란체스코는 한동안 말을 잇질 못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신산스러운 삶의 경험이 없었다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모멸감의 기억이 없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교종은 그 아픔을 알아차렸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소녀가 고대하고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답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마음 말입니다.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쏟지는 않았지만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프란체스코의 눈길이야말로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감싸는 외투였을 겁니다.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고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다지요? 이 세상의 굳어짐을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사명이 아닐까요? 문제는 종교가 가르고 나누는 일을 본령처럼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예수의 사역을 빗금 철폐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어떤 사회든지 빗금을 만드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가 살던 사회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거룩/속됨’, ‘의인/죄인’, ‘부자/빈자’, ‘/’, ‘/등이 구분되었습니다. 빗금의 이편과 저편에 따라 우리그들이 갈라지고 그러한 구별은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관습이 만들어놓은 그러한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백안시하며 살던 사람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도록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도래하는 것이겠지요.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을 어떤 규정성 속에 가두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만나면 참 불편합니다. 다가가 말을 건네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함부로 조롱하고 멸시하고 타매하는 것은 좀 문제 아닌가요? 나의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만용이 빚어낼 세상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저는 흑과 백으로 갈리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회색빛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문제는 빗금을 철폐해야 할 종교가 빗금을 생산하는 공장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보이는 배타성은 확고한 믿음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내적 부실함을 가리려는 가련한 몸부림이 아닌가요? 자신들의 비릿한 욕망을 종교의 망토로 가리려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도적떼>의 등장 인물인 카를은 기독교인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눈멀 수 있단 말인가? 형제의 흠을 찾아내는 데는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저렇듯 완전히 눈멀 수 있단 말이냐? 저자들은 구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너그러우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신들은 불꽃을 휘두르는 몰록처럼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팔순의 눈먼 노인은 문밖으로 내쫒는 족속들이다. 탐욕 부리지 말라고 아우성치면서, 금붙이에 눈이 멀어 페루인들을 말살시키고 이교도들에게 짐승처럼 수레를 끌게 한다(프리드리히 폰 실러, <도적떼>, 열린책들, 김인순 옮김, p.119).

카를의 말은 장군죽비처럼 우리 영혼을 후려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노엽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성찰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눈 덮인 설산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에 올라 오욕으로 얼룩진 말들을 버리고 청정한 침묵을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도스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된비알을 허위단심으로 오르는 동안 숨이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뭘 하든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반거충이로 살아온 세월이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면서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쌓인 응달에 서 있는 나무가 새삼 위대해 보이는 나날입니다.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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