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돌아왔지만 ‘개인 자격’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6)

  임시정부 돌아왔지만 개인 자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토진격 등을 준비하였다. 191931혁명을 계기로 413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와 싸운 한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1128일 건국 강령을 제정하여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성격과 강령을 마련하고, 129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19444월 약헌(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 김규식을 영입하고 민족 혁명당 등과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또 국무위원 장건상을 연안에 특사로 파견하여 김두봉을 비롯한 독립동맹 간부들을 만나, 충칭에 모여 통합 문제를 협의키로 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급진전하면서 김두봉의 충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사되었으면 해방 후 통일 과업을 논의하는 데도 큰 기여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임시정부의 당면 정책4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소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민주정부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 처단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1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만에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 지 18일 만인 11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 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목포 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일본에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 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 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 준비 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19일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식장에는 조선 음악가 협회가 제정한임시정부 환영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임시정부 환영가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없인 독립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맞이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없인 해방 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환국한 임시정부는 해방 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은 1231일 내무장관 신익희에게국자(國字)1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질서적으로 할 것.

3. 돌격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연료수도전기교통금융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함.

5.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제함.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 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 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 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김구는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측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19463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김구를 반동적반민주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앞으로 수립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하여 사실상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구는 격노하여 하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따졌다.

김구 :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당신들은 나라를 전략적으로 점령한데 불과하오. 자주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절실한 당면 과제인데 미소 양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소.

하지 : 김구 선생, 신탁통치안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한국의 자주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 아니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니, 물론 장군도 소련 스티코프란 자의 개회사를 기억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소공위는 한민족 전체의 염원을 짓밟는 강대국의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소.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하고도 엄숙한 의사표시인 것이오.(백범김구전집, 5)

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면서 김구는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을 제기하고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만나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김구 주석의 암살로 사실상 종료되고 말았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posted by

해방군 또는 점령군, 미군정 3년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5)

해방군 또는 점령군, 미군정 3

 

일본이 미국에 공식 항복한 날은 194592일 도쿄만의 미국 군함 미조리호 함상에서였다. 일본 정부 대표 시게미쯔 가오루, 일본군 대표 우메즈 미찌로우는 맥아더 장군 앞에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여 일본의 통치 권한을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둔다는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시게미쯔 가오루는 주중 일본 공사로서 19324월 상하이 일왕 생일 및 전승기념행사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가 잘린 장본인이다.

맥아더는 이날 연합군 최고 사령부 일반 명령 제1호로서 동아시아 각 전선의 일본군의 항복을 수락하고 그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연합국간의 지역적 분담을 발표했다. 이는 전동북아시아에 대한 국제적 역학 관계를 규정한 문서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북위 38도라는 인위적인 선에 의한 한반도가 양단되는 것이 드러났다.

일반 명령 제12항은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화태 및 천도열도에 있는 일본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해상항공 및 보조 부대는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3항은 일본 대본영, 일본 본토에 인접한 제 소도,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유구 제도,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앞서 820일 미군의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미군의 진주를 예고한데 이어, 92일에는 다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명의의 포고 삐라를 살포했다.남한 민중 각위에 고함>이란 제목의 재조선 미군 사령관 포고 1’2. 3으로 계속된 포고령은 해방군이기보다 점령군적인 내용이 담겼다. “주민의 경솔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는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이다.”, “각자는 보통 때와 같이 상업에 전념해주기 바란다.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 기설 기관의 파괴 등의 경거망동을 하는.” 따위의 협박적인 내용이었다.

이승만, 김구, 존 하지(John Reed Hodge) (출처: 서울신문)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마련한 일련의 정책과 분위기는 해방군이라기보다 점령군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냈다. 남한의 경우 912일 하지 중장이 아놀드 소장을 군정 장관에 임명하고, 20일에는 군정청의 성격임무기구 및 인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에 앞서 98일 남한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제1단계로 서울경기 지역을 점령하고 7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수원춘천 등을 점령했다. 2단계에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어 1010일까지 경기강원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3단계는 6사단에 의해 전남북 점령으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점령이란 표현을 썼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어서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충칭의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의 인민 공화국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 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조선인 행정 관리, 경찰을 인계받아 통치했다. 일제에서 미국으로 주인만 바뀐 셈이다.

하지 장군은 김성수 등 11명의 한국인을 군정 장관 고문으로 임명한데 이어 조병옥장택상 등을 경찰 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지주 출신의 친일 인사들을 행정 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경찰지주 등 반민족적 인사들의 재등장 과정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임시정부 인사들도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치안 유지법, 사상범예비 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 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점령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기에 발생한 대구 101 항쟁, 제주 43항쟁 등 민중 항쟁에는 친일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국민을 탄압, 수탈한 데서 발생한 요인이 적지 않았다. 이른바 통역 정치의 병폐도 많았다. 미군의 통역을 하면서 귀속재산을 가로채는 등 악덕 모리배가 횡행하였다.

미군정체제에서 입법 기구는 1946214일 개원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 효시가 된다. 미군정 사령관의 자문 기관으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이 선출되었고, 좌익계를 제외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을 사퇴하면서 김규식이 대리 의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것이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다. 1946년 미군정법령 제18호로 설치된 입법 의원은 민선 의원 45, 관선 의원 4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선 의원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 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 등 중도 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윤기섭이 선임되었다.

입법 의원에서 심의 제정한 법령이 50여 종이었는데 미군정은 민족 반역자부일 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과 농지 개혁법 등 가장 중요한 입법은 공포하지 않음으로써 친일청산과 농지 개혁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두 법안이 사산한 것은 한민당 출신의 입법 의원들과 미 군정청 간부가 된 친일세력의 방해 때문이었다.

미군정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 활동과 결렬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1946320일 개최된 미소공위는 미국측 수석위원 아놀드 소장, 소련측 수석위원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미소공위는, 김구김규식 등의 좌우합작과 남북 협상론, 이승만과 한민당측의 단독정부 수립론, 여기에 미국과 소련의 이해 대립으로 공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막을 내렸다.

19471114일 제2차 유엔 총회는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여 그 감시하에 19483월까지 자유 선거를 실시, 국회 및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소련측은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며, 한국 문제는 미소양군이 철수한 후 조선인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반대했다. 당시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유엔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를 실시토록 결의하였다.

19488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13일 한미간의 행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만 3년여 만에 미군정 체제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3년 동안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남한을 통치한 존 하지는 1893612일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정규 육사가 아닌 고등사관 양성소 출신으로 육군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24군단 소속으로 오끼나와에서, 1945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일본의 항복과 함께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선발되었다. 그와 그의 부대가 선발된 것은 한국에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는 주둔군 사령관으로 군림하면서 김구를 중국으로 추방하려 하는 등 한국 민족주의 세력을 적대하고, 국면을 분단 정부 수립으로 이끌어가는 주역이었다. “그의 점령 통치는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면 그만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역사남긴 부()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정용욱,존 하지와 미군점령통치 3)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posted by

누가 38선을 그었는가

  • 김구 김규식이는 1차 남북협상 때만 참가하였고 2차 때는 북측이 제안해서 열었는데 가지 않았습니다.. 고로 그 둘은 극우주의자입니다.

    지극히주관적 2020.12.01 01:26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3)

누가 38선을 그었는가

 

한민족은 918년 왕건이 삼한을 통합한 이래 1,000년 이상을 통일된 민족국가로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해왔다. 그 사이에 몽골의 전란, 왜구침범, 임진ㆍ정유재란 7년 전쟁, 정묘ㆍ병자호란의 치욕, 망국ㆍ식민지를 함께 겪었다.

우리 민족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항상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외세의 침략은 군사ㆍ정지ㆍ경제ㆍ문화ㆍ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났지만, 외압에 눌리면서도 결코 그들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주변의 강자였던 말갈ㆍ흉노ㆍ여진ㆍ만주ㆍ몽골족 등의 행방을 살펴보면 한민족이 얼마나 강인하고,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왔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고대 부족국가 형성기에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국토심장부와 주요 영역에 400여 년 동안이나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려시대 40년의 몽골(元) 지배, 조선조 전기 250년의 명나라 간섭, 병자호란 이후 260년의 청국 복속, 일제 35년의 식민 지배라는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민족의 정체성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따라서 한민족 공동체의 원형질이 되어온 ‘민족’이란 접두어는 우리에게 언어나 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늘 외세에 짓밟히고 강대국의 지배와 속박에 시달려온 우리에게 민족이란 용어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민족’이란 용어나 ‘민족주의’가 마치 고리삭은 개념처럼 배척ㆍ폄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나 침략주의형 민족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민족공동체의 유지와 이를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는 보호받고 앙양되어야 마땅하다.

1,000년 이상을 운명 공동체로 함께해온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분단 체제가 되었다. 강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죄는 일본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북에 각각 분단 정권을 세운 좌우, 남북의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이 적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으로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 국토가 양단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38선은 그동안 가족적으로는 이산의 아픔, 공동체로는 적대의 대상이 되어 증오의 칼날을 갈아왔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10.7선언 등 화해 협력의 시기가 없지 않았지만, 남북의 극우ㆍ극좌세력이 대결과 증오심을 작동하여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려 들면서 파탄되곤 하였다.

1.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같이 고향땅을 오고 가는데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歎)한다.

<가거라 삼팔선>, 1946, 이부풍 작사, 남인수 노래

 1.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하늘 저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꿈에 본 내 고향>, 1953년,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국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대일본전 기본 목적에 관해 협의한 결과로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코뮤니케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를 박탈하고, 만주ㆍ대만ㆍ팽호 열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며,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한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 조항을 넣어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 에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이 장개석 총통을 움직여 얻어낸 성과였다.

1945년 2월 4일부터 7일까지 미ㆍ영ㆍ소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다시 회담을 갖고 일본에 항복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공식 거론되지는 않았으나, 루스벨트가 제안한 미ㆍ소ㆍ중 3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재확인되었다. 이때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얄타 회담 (출처: Marion Doss (https://www.flickr.com/photos/ooocha))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수뇌 회담이 열렸다. 선언문에는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전후의 대일 처리 방침을 밝힌 13개조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 범죄자 처벌, 일본군수산업의 금지 등이 담겼다. 그리고 카이로 선언에서 채택했던 한국의 독립이 여기서 다시 확인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결 후 한반도에 관해 일정 기간 동안 4대국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구상이었다. 한국민이 자활ㆍ자력ㆍ자립의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미군이 오끼나와를 점령할 때 막대한 희생을 치룬 것을 감안하여 만주에 주둔한 일본 최강의 관동군을 무장해제시키는 데는 소련의 참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얄타 회담에서는 소련군이 유럽전에서 역할이 끝나는 즉시 대일 참전을 하기로 약속되었다. 일본은 8월 6일과 9일 두 차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도 소련의 참전을 기다리느라 항복의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소련이 참전하여 한반도의 북쪽에 들어오면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될 것으로 내다 본 것이다.

일본의 예상대로 8월 9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한반도를 공격 목표로 삼아 진격하였다. 8일에는 나진, 9일에는 웅기와 10일 경흥으로 진공하였다. 8월 9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의 조건부로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포츠담 선언의 수락 의사를 밝힘으로써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소련 극동군이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미국무성ㆍ육군성ㆍ해군성의 3자 정책조정위원회는 8월 12일 저녁 딘 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대령이 아시아 지도를 펴놓고 30분 만에 서울을 미국측에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북위 38선을 분계로 하여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지역을 나누자는 안을 만들었다. 이 안은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승계한 트루만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정식 제안하게 되고, 스탈린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다.

이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소련측이 의외로 손쉽게 받아들인데 놀라고, 소련측은 미국이 예상 외로 북쪽을 분할선으로 제시한데 놀랐다고 한다.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 문제에 전혀 문외한인 미국의 두 대령에 의해 쪼개지고, 이를 소련이 수용하면서 분단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딘 러스크는 나중에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고 본스틸 대령은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수용한 38선 분할은 미ㆍ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일시적인 잠정조치’ 라고 했지만 38선을 경계삼아 70년간 한민족의 허리를 잘라낸 국경선으로 굳어졌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ㆍ영ㆍ소 3국 대표들이 모여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는 통일정부수립, 친일파 척결과 같은 민족사적인 과제가 찬반탁의 회오리 바람에 매몰되고 말았다.

미ㆍ소공동위원회의 활동도 시간만 낭비한 채 끝나고, 결국 한반도 문제는 미국의 의지대로 유엔에 넘겨지고 ‘가능한 지역’ 만의 총선거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는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해방 3년 만에 남북에 두 개의 이질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38선은 경계선이자 국경선이 되었다.

김구, 김규식 등이 분단 정권을 반대하면서 남북 협상을 하고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과 회담을 하였으나 양쪽의 극우ㆍ극좌세력과 미ㆍ소 양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