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5)

행복은 성적순

 

공부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구도 행위가 되니, 그것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곧 성스런 공간이 된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단순히 인재 육성이나 가치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요 신앙의 수준에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게 된다. 따라서 어느 나라보다, 그 누구보다 우리 사회는 공부와 교육에 집중한다. 신분이 높건 낮건, 수입이 많건 적건 따지지 않고, 가리지 않고 모두 교육이라 하면 최우선시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정 경제에서도 1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녀 교육비이다. 절대적 빈곤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교육에 몰입하고 또 집중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교육이야말로 구원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모두들 영생하고, 구원을 받겠다는 데 누가 이런 본래적 욕구와 기대를 단순 윤리와 가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하여 교육 관계자들은 한국 사회의 이 오래된 교육 신앙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사회의 교육 문제 해결은 출구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Derek Winchester (https://www.flickr.com/photos/derekwin)

 

우리 선조들은 구원에 이르는 공부의 길을 현실적 제도 안에 담아 두었다. 그것이 우리가 자랑하는 찬란한 교육 문화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과거라고 하는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은 고려 광종(재위기관 925~975) 9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려는 기본적으로 개국공신들과 왕족 중심의 사회였기에 과거를 통한 세력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과거 제도가 보다 찬연한 빛을 발현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조선 시대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공식적인 제도로서 3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가 있었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거나 그에 걸맞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도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한다. 예서 조선 시대 과거 제도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과거라고 하는 시험만 놓고 보면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뉜다. 그리고 소과는 다시 초시와 복시라는 2단계가 있고, 대과는 초시-복시-전시 이렇게 3단계로 이뤄져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통 과거에 응시하는 이들은 저 5단계를 모두 통과해야만 최종 33명 안에 들 수 있었다. 소과를 통과하게 되면 생원이나 진사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고작 몇 백 명 수준이다. 그렇게 소과를 통과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바로 성균관이다. 성균관에서의 생활도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빡세다. 일단 성균관 생이 되면 1년 중 3백일 이상은 출석을 해야 다음 단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매 10일마다 시험을 치러야 했고, 월 평균 10회 이상의 모의고사를 치러내야만 하는 그야말로 시험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견뎌내야만 대과를 볼 수 있었다.

그 후 대과를 치르게 되면 초시에서 다시 2백여 명을 추려내고, 복시를 거쳐 마지막 33명을 걸러내게 된다. 바로 이들만이 과거의 마지막 시험이랄 수 있는 전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최후 33인에 들었다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이 마지막 시험을 통해 그들이 진출하고자 하는 관직의 최초 품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시의 장원 급제자가 받는 벼슬의 품계는 종6품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무관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다음 순번 자가 정7, 8품 등 순차적으로 낮은 등급을 받게 되니 마지막 시험이라고 해서 소홀히 여길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 받게 되는 품계가 중요한 것이 승진을 위해 소요되는 기간을 보면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각종 국가고시 합격자들이 임용되는 것이 5급 사무관이다. 대략 7급 공무원이 5급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기간을 생각해 본다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대과의 마지막 시험이 전시에 대하는 자세가 어떠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전시는 보통 임금이 임석한 자리에서 치러지게 되고 성적에 따라 갑--병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이 구분은 성적순이며 보통 갑 그룹이 3, 을이 7, 병에 23명 정도였다고 한다.

대략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면, 그와 더불어 그가 속한 가족 공동체가 영예를 얻게 되고 이는 유교적 구원을 이루는 죄상의 길이 된다. 따라서 여유가 있고, 형편이 되는 집안은 이 구원으로 이끄는 과거의 문을 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본래적 욕망에서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견고한 사회적 기재로 자리하게 된다. 이제 이즈음에서 조선 시대의 교육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유교 사회였던 조선의 교육 시스템은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 그리고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대과 준비기관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초등 교육은 서당이나 개인 교습으로 이뤄졌으며, 보통 천자문과도 같은 쉬운 문장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데, 서울 지역에서는 4부 학당이 그리고 지방에서는 향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인적 교육 기관이라기보다는 실상 과거 준비반이라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후 소과를 합격한 사람들만이 앞서 설명한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대과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은 철저히 국가고시 대비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최후 33인 안에 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더 나아가 최후 33인 중 1인이 되기 위한 욕망을 키우는 사회적 기재라고 할 수 있겠다. 철저히 성적 위주이고, 등수 중심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 된 것은 이렇게 얻어낸 최종의 성적이 그들의 행복, 즉 가문의 영속에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주술은 완성되어 갔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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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구도행위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4)

공부는 구도행위

 

영생의 교리도 준비되었다. 그리고 그걸 확증할 수 있는 종교적 의례(제사)도 구비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구도의 길일 것이다. 다시 꼼꼼하게 문제를 정리해보자. 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가족의 영생이다. 매우 상식적인 문제풀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가족 단위로 가게 되면 존속의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문 차원에서 생육하여 번성해야 한다. 이건 생활이 아니라, 종교요 신앙의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생하는 거니까.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어려울 것이 없다. 생존의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삶의 환경을 구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과제를 처리해야 하나? 뭐 크게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온다.

가문의 영광!”

누구보다도 질 좋은 환경에서 확고한 가족적 영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문은 영광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명예도, 평판도, 그리고 경제적 환경도 풍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해당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이 보다 더 잘 후손들을 이어갈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야 가문이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는가?’일 것이다.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세상에 나서서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다. 그때 이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가문이 것이요, 집단의 것이요, 공동체의 것이다. 따라서 가문의 성()을 가지고 입신하여 양명했으면, 그건 혼자가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된다. 그래서 유교 사회의 사람들은 기를 쓰고 양명할 가능성이 높은 가문의 구성원에게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는(전문 용어로 몰빵하는’) ‘종교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나보다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리고, 덩치가 조그마해도 입신양명의 가능성이 그에게있다면 모든 가문의 수혜를 몰아주게 된다. 그리고 가 얻어낸 양명의 명예를 모두가공유하려 한다. 아니 당연히 그것은 공유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양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했던가!

(출처: Derek Winchester (https://www.flickr.com/photos/derekwin)

 

이제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고 또한 느껴질 것이다. ‘가문의 영광’, ‘입신양명’, ‘출세’, ‘급제등등 유교 사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들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와 무게를! 이들 모두 영생을 위한 사회적 기재요 개인과 집단을 위한 윤리 되겠다. 그래서 유교 사회에서는 무섭게 가문의 영광을 위해 매진한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 행위의 최전선에 공부가 자리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 사회의 문제가 도드라진다. 공부. 바로 그 공부 때문이다.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 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그것을 지금 의식의 수준에서 알아채고 있는가는 뒤로 물리더라도 말이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국가는 모두에게 공평한 영생의 길을 제공하기 위해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디자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 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유교 사회는 과거를 매우 치밀하고 공을 들여 관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 가문은 나름대로의 현실적 선택과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남녀의 성별 선택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과거란 국가 고시는 오직 남자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 사회의 남성 중심적 사고를 이념적 성차별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건 신앙의 문제요, 형이상학적 구도에서 나온 선택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교 사회에서 여성도 공적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남존여비란 사회적 기재는 이미 오래전에 화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짐이 지금 우리사회에서 보이지 않는가. 각종 국가고시마다 수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매체에 오르내리는 여성 경영권자와 명사들의 일거수일투족. 이제 서서히 한국사회의 성차별도 줄어들 것이다. 바로 공적 자리 획득에 성적 제한이 없어져가기 때문이다.

그 다음 기회 균등의 원칙이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건 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가문의 영생을 위한 종교적 구도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기계적 평등에 세심한 배려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이다. 과거는 원칙상 천인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응시할 수 있는 국가 시험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두가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시험인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경제적 후원을 담보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양인신분보다는 양반 가문에서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은 조선 시대 양반이란 계급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획득신분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혈연으로 세습되는 신분은 왕족 외에는 없다. 임금 외에 다른 모든 관직은 각자의 역량을 통해 획득한 신분이다. 따라서 양반들은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적잖은 투자와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양인들은 양반신분으로 들어가 가족적 영생을 확증받기 위해 더더욱 잘난 놈 몰아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회의 균등이 사라진 과거제도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조 말 빈번해진 과거의 타락은 국가쇠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대의 유산은 고스란히 후대 사회에도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가지는 무게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너도 나도 계층별로 큰 차이 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몰두하고,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적어도 수백 년에 걸쳐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체득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무교 등 가릴 것 없이 한마음으로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정성으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진행되는 이러한 (공부가 마련해준) 사회적 행위를 구도행위 외에 다른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니 공부가 가문의 영속을 보장하는 구도행위라는 것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는 않으리라.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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