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껍질



어릴 적 동네 뒤편엔 작은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엔 제법 굵기도 하고 키도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어린 소나무들과 함께 서 있었다. 심심할 때면 우리는 뒷동산에 올라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하고 굵은 가지에 끈을 매달아 그네를 타기도 한다. 두툼한 소나무 껍질을 떼어 낸 후 배 모양으로 깎아 꽁무니 쪽에 송진을 바르면 송진은 이내 무지갯빛으로 퍼지며 배를 앞으로 밀어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언젠가 할머니가 꺾어준 소나무 껍질이다. 할머니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낸 후 껍질 속의 또 한 껍질을 건네주었다.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입안으로 확 퍼졌던 송진 냄새,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주며 할머니는 당신이 한 평생 겪어온 보릿고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리가 났을 땐 그것도 없어 못 먹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돌아가신 이후로, 기억보다는 사진 속 모습으로 남아있는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가 건네주었던 소나무 껍질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쉽지 않은 송진내와 함께 할머니 세대가 겪어온 가난과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일러주는 기억으로.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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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생의 글씨 찾기



어릴 적 했던 놀이중 하나는 글씨 찾기였다. 술래가 딴 데를 보고 있는 사이 땅바닥에 글씨를 새겼다. 


땅을 판판하게 고른 후 막대기를 가지고 글씨를 새겼는데, 글씨를 새긴 후에는 다시 새긴 글씨를 덮어 발로 꾹꾹 밟아 글씨를 지웠다. 그리고 나면 술래가 나서 새긴 글씨를 찾는 놀이였다. 


조심조심 손으로 흙을 쓸다보면 조금씩 새긴 글자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새긴 글씨를 맞춰내면 술래가 바뀌곤 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나면 이내 땅거미가 찾아들고, 그리고 나면 하늘엔 하나 둘 별이 돋기 시작한다. 먼저 불 밝힌 별이 옆 자리 별에게 불 건네주는 듯. 하나 둘 별빛이 번져간다.


-난 꺼졌어. 다시 한 번 줘.


교회 계단에 앉아 별빛 번져가는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다 어릴 적 글씨 찾기 놀이를 생각한다.


숨겨진 글자를 찾아내듯 조심스레 뜨는 별. 내 생(生)에 새겨진 글자는 무엇일지. 내게 주어진 시간 위에 새겨진 글자는 무엇일지. 


조심조심, 땅 위에 새긴 글씨 찾기 위해 흙을 쓸어 내렸듯 그렇게 생을 보듬고 싶다. 마침내 드러날 생의 의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생의 글씨 찾기.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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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드릴게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저에게도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도드릴게요

바람결에 무심히 날려온 
마른 풀씨 같은 말 한 톨

기도드릴게요

저는 말을 믿어요
씨앗은 자란다는 진리처럼

아무리 작은 말 한 톨이라도
그 말을 믿어준다면

아무리 하찮은 말 한 톨이라도
그 말을 품어준다면

햇살과 비를 맞은 씨앗이
언젠가는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듯

웃음과 눈물로 품은 기도는
아름답게 자라난다는 사실을

저는 믿어요
저를 위해서 기도드린다는 당신의 말도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드리고 계신다는 
성령님의 마음을 닮은 그 마음으로

기도드릴게요

이 말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제겐 가장 든든하고 기쁜 선물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당신을 위해서 

기도드릴게요

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당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이 마음이

이 기도의 말이 사실은
가장 먼저 저를 행복하게 해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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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 너는 별




이제는 괜찮아요
어둔 밤이 날 찾아와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길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구에게 말을 걸까
아무도 없는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도 몰라

그렇게 가끔
어둔 밤이 날 찾아오면

나는 그대로 
고요한 밤이 되어도 좋아요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더욱 빛나니까요

긴긴 겨울밤 
울며 마음속까지 시린 날

홀로 앉아 바라보던 
곱디 고운 밤하늘처럼 

내가 그대로 
거룩한 밤이 될 수 있다면

너의 고운 두 눈에 맺힌
별처럼 빛나는 눈물이 보일 테니까요

작고 마음이 가난한 내가 
그리할 수 있다면

나는 혼자서도 아름다운 
밤이 될래요

이름도 없이 
슬픈 너는

아름다운 나의 별이 되어서
두 눈 반짝이는 웃음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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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는 시작



목요성서 모임에 참석하는 한 자매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하여 위문차 병원을 찾았다. 2층 맨 끝 방,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 잠시 기도하고 그냥 나오려는데, 침대 책상에 놓인 책과 원고지가 눈길을 끌었다. 얼마나 급한 것이기에 병원에 와서도 원고지일까 바라보니 원고지엔 성경 말씀이 적혀 있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시편 1편 말씀이었다. 또박또박 쓴 글씨, 마치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간 아이가 처음으로 글자 공부한 듯 반듯반듯한 글씨였다. 마음에 새긴 조각인 듯 글씨가 그랬다. 성경말씀이 끝난 맨 아랫줄에는 한 줄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순종과 인내를 가르치소서."


그렇다. 그는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병실에 누워서.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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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뿐인 할머니의 전화



“글쎄, 이번 달엔 전화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어유. 쓴 적두 별루 읍는데.”


속회예배를 마쳤을 때 윤연섭 할머니가 전화요금 걱정을 했습니다.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홀로 살고 계신 할머니가 전화를 놓은 건 재작년 일입니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돈을 모아 전화를 놓아 드렸던 것입니다. 눈이 어두운 어머니를 위해 전화기의 반이 숫자판으로 되어 있는 전화기를 골라 샀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할머니는 드물긴 하지만 전화 걸 일 생기면 ‘건넌말 애덜 불러다 숫자 눌러 달라’ 하던지, ‘애덜 읍슬 땐 전에 그랬듯 딴 집 가 돈 주고 걸든지’ 그렇게 지내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의 수신전용 전화기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요금이 많이 나왔다니 얼마나 나왔을까 궁금하여 여쭙자 “삼천 원이 넘게 나왔어유. 매달 천 몇 백 원씩만 내문 됐는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삼천 원이 넘게 나와 걱정하는, 기다림뿐인 할머니의 전화. 순간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바람처럼 맘속을 지났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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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함께 탄 버스



“그래두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정 품도 팔구 해서 쪼끔씩 쪼끔씩 뫄 둔 게 있었어유. 그래두 그게 몇 만원은 돼 두 늙은이 이럭저럭 썼지유.”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부론 지나 흥호리에 살고 계신 할머니였는데 친척 되는 분 생일이라 잠시 다녀가는 길이었습니다.


할머니께 들으니 올해 72세 되신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건강할 수가 없었던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2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이젠 아예 누워 바깥출입조차 못하시고 계십니다.


“그냥 저냥 지내다 살문 살구 죽으문 죽구 하는 거지 뭐, 별 수 있나유. 돈이나 있으문 냉큼 병원으로 모셔서 되나 안 되나 치료나 받았으믄 딱 좋겠구먼.” 


그저 두툼할 뿐인, 제법 낡은 털 스웨터. 듣는 얘기 탓인지 할머니가 더욱 추워 보입니다.
“자식들유? 3남 2녀 있긴 있지유. 다 나가 지들 밥 벌어 먹고 살기두 바빠유. 명절 때나 들리군 하지유.” 


젖은 건 할머니 두 눈가만이 아닙니다. 나직한 목소리도 젖어 있습니다. 괜한 것들을 여쭸지 싶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직행버스, 먼저 오르며 할머니 차비까지를 계산합니다. 할머니 옆에 앉아가며 더 이상 아무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창밖만 내다봅니다. 어르신들이 겪는 아픔이 내 동네 일 만이 아님을 새삼 확인합니다.


이 땅의 봄은 얼마나 아득한 것인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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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



김 집사님은 요즘 며칠째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뙤약볕 밑에서 고추 따다가 쓰러진 후 점점 기력이 쇠약해졌습니다. 


이따금씩 들릴 때마다 집사님은 아픈 다리를 걷어 올리시며 손 얹어 기도해 달라 하십니다. 별 효험이, 아니 아무런 효험이 없는 줄 알면서도 목사라고 제 손길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기도 중에 심한 통증이 일어나 서로가 어려웠습니다. 기도하면 아픈 게 싹 가시고 낫고 해야 할 텐데, 기도하는 중에 더 큰 통증이 왔으니,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 다니던 교회를 친척네 다녀와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선아 할머니가 며칠 전엔 김영옥 집사님을 따라 새벽예배에도 나오셨습니다. 


예배를 마쳤을 때 집사님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선아 할머니가 늘 머리가 아파 고생이니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를 합니다. 효험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마음을 담아 기도 부탁에 응합니다. 

손, 부끄러운 손에 대한 부끄러움. 따뜻한 사랑과 힘이 배인 손하고는 영 거리가 멉니다. 
알면서도 기도를 청하는 교우들 앞에 기도를 합니다. 


능력없음에 대한 자괴감은 맘속 내 몫일 뿐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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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날리는 객토작업



객토 작업을 합니다. 차라리 탱크를 닮은 15t 덤프트럭이 잔뜩 흙을 실고 달려와선 논과 밭에 흙을 뿌립니다. 


땅 힘을 돋는 것입니다. 땅에도 힘이 있어 몇 해 계속 농사를 짓다보면 땅이 지치게 돼, 지친 땅의 힘을 돋기 위해 새로운 흙을 붓는 것입니다. 트럭이 갖다 붓는 검붉은 흙더미가 봉분처럼 논과 밭에 늘어갑니다.


객토작업을 보며 드는 생각 중 그중 큰 것은 고마움입니다. 그건 땅에 대한 농부의 강한 애착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농촌이 천대 받고 아무리 농작물이 똥값 된다 해도, 그렇게 시절이 어렵다 해도 끝내 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땀 흘려 씨 뿌리겠다는 흙 사랑하는 이의 눈물겨운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흙먼지 날리는 객토작업을 불편함보단 든든한 고마움으로 보게 됩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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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놓은 때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초등학교 시절 잊지 못할 일 중의 하나는 배급식량이었다. 강냉이 죽, 우유가루, 빵 등을 우린 학교에서 얻어먹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얻어먹는 맛에 즐겁기만 했던 원조 식량들, 그건 먼 나라에서 보내온 구호식품이었다. 넉넉지 못한 양식, 왠지 모를 배고픔을 우린 원조식량에 의지해 한껏 덜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5학년 때였을 게다. 그때 우리에게 지급된 구호식품은 가루우유였다. 커다란 종이부대에 담긴 구호식품 우유가 나오면 우린 한 봉지씩을 나누어 받았다. 양은그릇으로 하나씩 나누어 주는 일은 반장인 내 몫이었다.


차례대로 한 사람씩 우유를 퍼 주다보니 자루가 점점 줄게 되었고 나중에 자루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몸을 옆으로 숙여 깊숙이 손을 집어넣고 우유를 펴내느라 애쓰고 있을 때 선생님이 다가오셔 내 옷을 힘껏 걷어 올려 주셨다. 걷느라고 걷어 올린 옷에 우유가루가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당혹감이란. 그때만 해도 목욕을 자주할 때가 아니었다. 그저 물을 데워 부엌에서 대강 때를 밀어야 했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팔뚝의 때란, 세수할 때 물 닿게 되는 부분을 경계선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기가 일쑤였다.

아무 예고 없이 몸을 드러내야 하는 일을 만날 때마다 난 아직도 당황하곤 한다. 숨겨놓은 때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지 싶다.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을 활짝 열고 싶은 건 마음뿐. 늘 그 일에 두려움이 앞서는 건 초등학교 5학년 배급식량을 퍼내다 선생님에 의해 드러난 팔뚝 위의 때,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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