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님, 제가 아직 짓지 않은 많은 죄에서 저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슬퍼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이 저의 친구이든지 적이든지, 그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제 친구로 되기를 기도합니다.”(Margery Kempe, 1373-1440)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무더위를 잘 견디고 계시는지요? 날이 얼마나 더운지 모기들도 활동을 쉬고 있다지요? 물것을 많이 타는 분들에게는 이 여름이 주는 작은 위안인 것 같습니다. 낮에는 차마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아 이른 새벽에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걷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인 동시에 얼크러진 생각의 타래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한낮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실은 다른 누군가의 수고의 결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올림픽은 편안한 거실에서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그날만을 학수고대했던 선수들에게는 수확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달을 따든 따지 못하든 일단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든 선수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많다고 합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며 고독한 싸움을 하는 이들을 크게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단련된 몸이 그리고 고도로 집중된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표지들입니다. 나이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장년의 선수들도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운동 경기도 즐기지만, 그들이 빚어내는 삶의 이야기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말 그대로 평화의 제전이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면 전쟁도 중단하고,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적대적인 국가를 통과할 때도 그 안전이 보장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올림피아 제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나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자, 소수의 (그리스)아르카디아인들이 일자리를 얻으려고 페르시아 진영으로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군의 행동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신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군이 올림피아제전을 벌이면서 체육 경기와 전차 경주를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기의 상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탈주자들은 승리자들에게는 올리브 가지로 엮은 관이 수여된다고 답했습니다. 상품으로 금품이 아닌 화환이 수여된다는 말을 듣은 트리탄타이크메스는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아 마르노니오스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과 싸우게 만들었는가? 금품이 아닌 명예를 걸고 경기를 행하는 자들과!”(헤로도토스, <역사 下>, 박광순 옮김, 범우사, p.305)

물론 이 기록은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그리스의 자유 정신을 대조하기 위한 헤로도토스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보상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 정신임을 자부심을 담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에 대한 기록자인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의 DNA 속에 그런 도도한 자유혼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건강이 유사 종교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로마시대 문장가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benalis)의 풍자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원래 의미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라틴어의 표현을 직역하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할 일이다”가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속뜻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김용석, <일상의 발견>, 푸른숲, p.139). 몸을 단련한다고 하여 곧 정신이 맑아지거나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그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올림픽 경기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올림픽은 그 시대에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고전 9:24) 꼭 신앙생활의 목표가 ‘상’을 받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목표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일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일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일상입니다.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반복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을 지겹게 느끼기에 뭔가 짜릿하고 특별한 경험을 구하거나,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김용석 교수의 말이 우리 폐부를 찌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은 새콤달콤 ‘잘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에게 좀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거나 ‘이미 잘살고 있다’는 것을 크렁크렁 과시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의미 있는 일상이 그들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김용석, 앞의 책, ‘머리말’ 중에서)

‘만일 예수님과 동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란 가정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상세하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할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신정론의 문제를 여쭤볼까?’, ‘당신을 배신하기로 이미 마음 먹은 유다의 발을 닦아주실 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여쭤볼까?’ 제게 정말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깊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일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주무시는 모습,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길을 걸으시는 모습, 가련한 이들과 만날 때의 눈빛, 그리고 영혼의 목마름에 시달리는 이들을 향해 가만가만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음성, 귀신을 꾸짖으실 때의 어조, 적대적인 질문을 하는 이들을 대하실 때의 호흡... 누군가의 일상을 보면 그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 삶을 뒤흔들어놓는 것은 누군가의 심오한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자기 일상을 살아내는 이들의 아름다움에 눈을 뜰 때가 아니던가요? 신앙생활은 일상과 무관한 가외의 생활이 아니라, 일상 속에 하나님의 뜻이 배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없는 거룩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믿음을 올림픽 경주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절제란 자기 훈련 혹은 자기 통제를 의미하지만 실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 느긋한 시간을 누리고 싶은 욕구, 친한 벗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욕구, 이기적으로 처신하고 싶은 욕구. ‘절제’는 욕망과의 거리두기입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위대한 전도자로 살았던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노력 덕분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켰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 9:27b)

자기 기만에 빠져 결국 영혼이 텅 빈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피땀을 흘리며 훈련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이 자극적인 표현은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얻게 될 ‘썩지 않을 월계관’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표현일 겁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자기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운동선수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욕망과의 거리 두기가 더욱 필요한 시기입니다. 교우들의 애경사가 있어도 공동체가 함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여름을 처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롱나무에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저마다 한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기쁘게, 깨어서 우리 일상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기쁨도 누리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021년 7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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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흙벽돌로 지은 허름한 방, 임시로 마련된 예배처소도 그러하고 내 기거할 방도 그러하다.
문득 생각하니 묘하다.


동화작가 권정생에 대한 얘길 듣고부터는 흙벽돌집에 대한 기대를 은근히 가져왔지 않았는가. 


맑게 설움이 내비치는 사람, 그는 동내 청년들이 빌뱅이언덕에 지어준 작은 흙벽돌집에서 꽃과 함께 생쥐와 함께 살고 있다.


겉은 더 없이 허술해도 방안은 아늑한 집, 다른 건 없어도 좋아하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곳, 많진 않지만 책을 둘러쌓으니 마음속 바래왔던 기대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낮에도 문을 닫으면 불을 켜야 하지만 족하다.


작은 카세트임에도 FM 방송이 두개씩이나 나오고, 커피와 촛불과 노래가 있으니까. 고요한 시간은 보다 창조적일 수 있을 테니까. 책상 앞 벽에 “所有는 적으나 存在는 넉넉하게”라 써 붙인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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