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3분

 


라벤더의 연보라빛
곡우 무렵 찻잎의 연두빛

식물이 물과 만나 물들어가는 시간
처음 3분의 만남에서 태초의 우주를 본다

찻잎을 물에 넣고 3분을 우려내면
라벤더와 찻잎은 향이 좋고 단맛을 머금는다

하지만 3분을 넘기면
식물은 쓴맛과 불순함을 내뿜는다

한민족의 경전인 단군의 천부경
일시무시일 석삼극무진본

하나에서 시작해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하나 속에는 천지인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는 3의 원리

우주 탄생 빅뱅의 처음 3분은
수소와 헬륨 원자가 결합하는데 걸리는 시간

한밝, 크고 밝은 민족
배달민족의 피 속에 각인된 숫자 3의 신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심 3일이라는 옛말과 겹쳐본다

사람의 마음은 3일이 지나면 변한다지만
하루에 수 십 번도 나는 그 3분의 고개를 넘지 못한다

마음이 물처럼 흐를 수 있다면
마음이 구름처럼 흐를 수 있다면

마음에 떨어진 씨알이 3분이 지나 변한다면
3분을 단위로 새로운 마음을 먹기로 한다

처음 3분의 박자로
새로운 마음을 먹는다

처음 3초의 호흡으로
새로운 숨을 쉰다

몸은 땅이 되었다가 
하늘이 되었다가

그러나 한마음 먹기의 무게가 
우주의 무게가 될 때가 있다

찻잔 속에는 3분
4월의 하늘이 푸르게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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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광원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가장 인상적인 일은 애광원을 방문한 일이었다. 거제도, 한 정치가의 고향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곳은 차로 열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지도를 펴 놓고 확인해보니 남쪽의 맨 끄트머리 한쪽 구석이었다. 춘천의 권오서 목사님과 사모님, 서울의 유경선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 다섯 명이 동행하게 되었다. 


애광원은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아름답게 어울린 장승포의 한 언덕배기에 있었다. 건물자체가 애광원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 했다. 


애광원은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특수기관이었다.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 의료재활 활동과 직조·봉제·도예·조화·축산.칠보·염색·원예 등 작업재활 활동, 화훼·버섯재배·무공해 채소재배 등 자립작업장이 운영되는 애광원과, 중증 장애자를 수용하고 있는 ‘민들레 집’이 언니와 동생 두 분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원장님의 안내로 애광원을 두루 돌아본 우리는 내내 말을 잃고 말았다. 무책임한 말이라 할진 몰라도 수용되어 있는 한 아이 한 아이는 그야말로 ‘버려진 생명’들이었다. 누구하나 관심 갖지 않아 외면 받은 생명들을 애광원과 민들레 집은 이유를 묻지 않고 곱다랗게 품어주고 있었다. 
중증 장애자들의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막대기처럼 가느다란 손과 발을 가진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온몸이 움직여지질 않아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방마다엔 그들을 돌봐주는 사랑의 손길들이 있었다.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인 그들은 그 야윈 손을 붙잡고, 자신의 힘으론 꼼짝도 할 수 없는 손을 마주 잡고선 시간도 잊은 채 무언가를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나아도 나았다 할 수 없을 생명들 앞에 포기하지 않고 손을 잡는, 따뜻한 체온으로 체온 이상의 것을 전해주는 그들의 모습은 엄숙했고 거룩했다. 


아이의 작은 웃음 하나하나에 우주가 열리는 기쁨을 맛보는 그들 앞에, 말로 설교하며 살아가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참 신앙은 말 너머의, 말 이상의 것임을 그들은 말없이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었다. 


혼자서 허리 운동을 하는 한 아이를 만났는데, 원장님의 설명으로는 그 아이가 그 정도가 되기까지는 한 봉사자의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꼼짝도 못하는 한 아이를 위해 바친, 오직 한 생명만을 위해 바친 5년의 시간. 그 한결같은 5년의 시간이 일으킨 미미한 변화, 그러나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랑의 기적이었다.


한 방 한 방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우리가 벗어놓은 신발은 신기 좋도록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온몸이 뒤틀어져 마음대로 몸을 못 놀리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손길은 그리도 고왔다. 단지 성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인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시설을 둘러보며, 그만한 시설이 있기까지의 어려움이 얼마였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자꾸만 머릿속엔 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없이 어이없는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을 이 땅의 수많은 생명들, 그들의 모습이 괴로움으로 떠올랐다. 아이들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래도, 너희들은 행복한 아이들이란다.’ 마음속으론 그렇게 말했다. 


우연히 눈에 띤 자그마한 네잎 클로버를 나중에 원장님께 전해 드렸다. 성경 갈피에 꽂겠다며 원장님은 당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셨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드림을 훌륭하게 받아주신 셈이다. 그런 마음이 모여 오늘의 애광원이 되었지 싶었다. 


애광원의 일을 돕고 있는 독일의 쿠르제 목사님은 그날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얘길 듣고 보니 그날 오전은 목사님의 일주일 생활 중 ‘편지를 쓰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한 주일 생활 계획 중 편지 쓰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 놓은 모습이 특이했고 배워야 할 일로 여겨졌다. 


애광원은 아름다웠다. 애광원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랑의 손길도 아름답고, 언덕배기에 선 애광원 건물 자체도 아름다웠다. 장애복지시설 건축 설계를 전공한 강 박사(원장님은 그분을 천사라 불렀다)가 설계한 애광원은 장승포 포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언덕이라기보다는 낭떠러지였을 그 땅에 튼튼하고 아름답게 서 있었다. 


위태한 생명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듯 비탈진 언덕에 아름답게 선 애광원, 건물 자체가 애광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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