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신동숙의 글밭(230)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들숨 날숨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왠지 그 물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이고 우주의 조화에 걸맞는 물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몸은 인간의 몸이지만,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 중에서 보다 가까운 물질은 무엇인가 하고요. 지구의 구성 원소인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의 오행과 연관 지어서 거듭 되묻고는 합니다. 어딜 찾아가서 생년월일시에 따른 사주로 알아보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묻고 거듭 주의를 기울이는 이러한 일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 즉 명상에 가깝습니다. 


밖에서 구하기보다는 내면에서 구하고자 하는 답입니다. 아주 원초적인 본래의 답을 구하는 길은 밖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이라고 선각자들은 한결같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도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감동과 울림이 아니고는 외부의 힘으로는 일시적으로 움쩍할 지는 모르나 사람은 그런 타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도 부합합니다. 물론, 타인과 모든 대상은 나를 비추어 주는 좋은 거울로 삼으며 언제까지나 고마운  존재들이자 또 다른 나 자신인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은 대부분 단시일에 또는 몇 년 만에 답을 내겠다는 데 욕심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질문 하나가 평생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지푸라기 한 올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씨앗처럼 마음밭에 심겨진 질문 한 알이 어느새 점점 자라나서 굵은 나무둥치로 제 곁에 듬직히 서 있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습니다.


물, 나무, 불, 흙, 쇠. 이 오행 중에서 답은 딱히 어느 하나라고 지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제 내면은 출렁이는 물이 되었다가 끓어오르는 불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색 중에 뭔가에 막힐 때면 단단한 돌이 되기도 했고요. 유독 나무를 좋아해서 집안에 있는 몇 안되는 가구 중 책상, 식탁, 책꽂이, 의자 하나까지 대부분의 가구가 원목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요즘은 딱딱한 나무의자가 베겨서 방석을 깔지 않고는 오랜 시간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방석이나 작고 도톰한 담요를 깔고 앉아서 끼니도 때우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이렇게 글도 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깝게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목련나무, 무화과나무, 길가의 가로수 또는 나무로 만든 연필이나 자그마한 도구까지 나무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무만 보면 마음이 평온해져 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거듭 태초의 질문인 듯 묻고 또 묻는 물음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나무는 청정한 숲에서 스스로 제 본래의 성품대로 잘 자라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 곁에 가까이 가고 서성이거나 바라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나뭇잎 사이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는 행복감을 표현하기에는 늘 언어란 것은 바닷 속에서 건져 올린 조개껍데기 하나 밖에는 되지 못하다는 걸.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데기로 바다를 떠올릴 수는 있어도, 바다는 그보다 훨씬 깊고 그 생명력은 한이 없으니까요.


나무는 뭔가 저에게 부족한 성품을 보완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나무를 가까이 곁에 두고 묵상을 하다 보면 점점 끝없는 나무의 덕성을 닮아 가고픈 소망이 가슴 속 깊은 밤하늘로부터 소망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의 친구', 나무도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나무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나무 둥치 곁에 깃들어 살아가는 작은 풀꽃과 강아지풀도, 하나의 나무를 돌돌 감고서 오르는 나팔꽃이나 작은 나무 줄기를 보자면 꼭 껴앉고 있는 이유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해보지만, 당시의 답은 여전히 마음을 스쳐 지나는 바람 한 자락일 뿐입니다.  


그리고 숲의 자잘한 식물들이 귀엽고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 가운데 종종 문득 차를 몰아서 산으로 들어갑니다. 목적 없이. 단지 그 장소에 저를 데려다 놓습니다. 제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열심은 그뿐입니다. 그리고 깨어서 바라보는 일. 그러면 자연이 알아서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저 산이 좋아서 찾는 것이지요. 산과 나 사이에  끌어당기는 그 자력은 산의 힘 때문인지 제 힘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평온히 산에 기대는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가운데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를 사귐에는 오로지 정신을 깊이 하는 일 말고는 딴 뜻을 두지 말라.' 


법정스님의 풀이로 거듭 마음에 새겨 보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가 정신을 깊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이다. 정신을 깊이 하는 일을 통해서, 서로가 힘이 되고 빛이 되어 한없이 승화할 수 있다. 형식 논리로는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밖에 안된다. 그렇지만 정신을 깊이 하는 창조적인 우정에는 둘을 넘어 열도 백도 될 수 있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열도 백도 되다 보면 그 만큼 둘레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덕스러운 우정이 된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법정스님은 거듭 구체적으로 우정에 대해서 충언을 해 주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절과 신의와 창조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서로에게 아무런 덕도 끼칠 수 없다. 빈꺼풀끼리는 이내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니까. 그러니 상호간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그 사이가 날로 새로와져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된다.'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상식이 되어버린 칼릴 지브란의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얽매지는 말게. 마치 한 가락에 울리는 거문고 줄이지만 그 자리는 따로 따로이듯이.' 우정의 소망을 떠올릴 때면 이만큼 좋은 지침도 없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 맑은 말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면 일그러진 한 영혼이 비쳐질 뿐입니다. 


사람에게 냉정하고, 판단하고, 상대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르면서 스스로가 편한대로 성급하게 안정적인 답을 내어버리는 교만이 늘 고개를 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만으로 인해 의식 무의식 중에 제가 상처 준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앞산 뒷산입니다.


청년 시절 제 책꽂이에 꽂혀 어둔 마음에 등불이 되어준 전우익 선생님의 메시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선생님의 한 마디와 칼릴 지브란의 글과 법정스님의 글은 저에게는 그냥 글이 아니라 생생한 육성 아니 영성(靈聲)에 가깝습니다. 한 영혼이 한 영혼에게 말하는 살아있는 영혼의 소리로 생생하게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첫 물음에 이어서 저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와 사명에 대한 그 다음 물음이 이어집니다. '나는 무엇하러 왔는가?'. 그동안 지나온 세월 중에 저를 스쳐간 인연들, 곁에 머물고 있는 인연들을 해처럼 떠올려 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위나 작은 돌멩이처럼 마음을 막히게 하고 무겁게 하는 인연들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많이 있겠지만 먼저는 저의 교만함이라는 장애물이 먼저 떠오릅니다. 더 기다려주고, 더 마음을 내어주고, 더 마음을 열어놓지 못했을까 하는..


예전의 아버지께선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시간을 들여서라도 한 올 한 올 풀면서 오랫동안 앉아 계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실이나 모든 물품들이 귀하기도 했지만, 자연을 닮은 어른들의 성품에는 뚝 끊는 행위보다는 정성을 들여 풀어내는 편이 심성에는 더 자연스러웠을 터입니다. 


언젠가부터 식당에서 냉면이나 고기를 가위로 싹뚝 자르는 모습을 자연스레 봅니다. 씹는 행위의 편리함을 위해 스스럼 없이 저지르는 일. 저 자신에게서도 무심코 자행되는 그런 일. 인연의 줄을 그런 식으로 끊어낸 제 모질고 교만한 마음을 제 곁으로 가까이 데려 오기로 합니다. 교만하고 모진 마음을 데려와 손잡고서 함께 자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가 손을 잡고서 화해를 하는 일입니다. 처음 물음 뒤에 이어진 그 다음 물음에 대한 답인 돌덩이 같은 교만을 보드라운 흙으로, 순한 물로 흐르게 하고, 꽃으로 피우는 일, 어쩌면 이 땅에 태어난 저의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서 풀냄새, 나무 냄새, 흙과 푸른 하늘 냄새를 맡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과 묵상으로 깊어진 고요한 고독의 방을 내면에 지닌 이가 있습니다. 그 내면에 너른 대지와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내면의 텅 빈 충만감 속으로부터 맑고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사람. 드물지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는 비록 사람의 몸이지만, 그런 사람으로부터는 자연을 닮은 본래 맑고 천진스러운 마음이 있어, 생생한 생명력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는 서로의 때가 익으면 만나게 될 테지요.


자연과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사람을 친구로 둔다면, 칼릴 지브란과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서로가 정신을 깊이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함께 가되, 없다면 혼자서 가겠지만, 사람은 제 눈에 제 그릇 밖에는 볼 수도, 담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자연과 마음으로 눈을 돌리고, 귀를 열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듭 교만의 자리에 겸손을 앉혀 놓으려 숲에 기대어 숨결을 고릅니다. 그 걸음에 제가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 중에 좋은 방법이 바로 시(詩)쓰기입니다.


오늘은 9윌 9일 중구절입니다. 중양절이라고도 하는 이날은 어릴 적 집에서는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거나 오래된 조상들의 제사를 모아서 일 년에 단 한 차례 지내던 조촐한 제삿날이었습니다. 또 중양절에는 국화주와 국화전을 나누어 먹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추수를 마무리하던 24절기 중 한 절기입니다. 이날 저는 가을에도 빛을 잃지 않은 꽃들을 보면서 그 앞에 교만함을 내려놓습니다. 그루터기가 되어서도 둘레에 많은 생명이 깃들어 살아가게 하는 나무의 그 덕성을 떠올려봅니다. 국화주 대신 국화차라도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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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손

한희철의 얘기마을(79)


다친 손




지난 봄철 홍역으로 시작된 규성이의 병치레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쁜 일철, 논둑 밭둑에서 잠들어야 했던 어린 규성이가 막 홍역이 끝나자 이번엔 손을 덴 것입니다. 


뜨거운 김이 하얗게 오르는 밥솥에 엉금엉금 기어가 손을 얹고 만 것입니다. 겨우 걸음마를 배워 밥솥 잡고 일어설 나이, 뜨겁다고 이내 손을 떼지 못한 것인데 그러느라 손을 제법 데고 말았습니다. 좋지도 못한 교통 사정, 규성이 엄마가 서너 달 혼났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병원을 다니며 다 나았다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다친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웅크리고 펴지지 않는 손, 손이 아물며 안으로 오그라든 것입니다. 


처음엔 엉덩이 살을 떼어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등 엄두가 안 나는 이야기라 낙심천만이었는데, 다행히 한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두 살이 되어야 수술하기도 좋다 하여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누군 엄마 탓을 할지도 모릅니다. 농촌의 아낙만큼 바쁜 일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 맏며느리인데요.


넉넉한 웃음으로 견디는 규성이 엄마가 미덥지만, 안으로 후둑후둑 헐릴지도 모르는 마음 헤아리면 바라보는 내가 서글퍼집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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