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

신동숙의 글밭(229)


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


모든 생명은 숨을 쉬면서 살아갑니다. 숨이 붙어 있으면 산 목숨이오, 숨이 끊어지면 생명이 다했다고 흔히들 얘기합니다. 평생 우리 몸에서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 호흡이지만, 오장육부의 자율신경계와는 달리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자율 의식으로 그 완급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또한 호흡인 것입니다. 


숨을 내쉬고 이어서 숨을 들이쉬는 그 사이에 삶과 죽음이 있으며 또한 그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는 선각자들의 말씀이 마음을 환하게 합니다. 그보다 앞서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는 천지창조의 말씀에서도 생기 즉 숨의 생명력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숨이 먼저인지 들숨이 먼저인지 그 이치를 가만히 헤아리다 보면, 호흡이라는 뜻글자를 만들 때 선각자의 그 지혜로운 깨달음 앞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의 지혜는 우리네 삶의 모든 순간마다 빛을 비추어 매 순간의 구슬을 꿰어서 온전한 하나의 고리로 엮어 주는 투명한 실이 되기도 합니다. 호흡에 따라서 얼마든지 삶의 결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맨 처음의 호흡(呼吸)은 내쉴 호(呼)입니다. 뜻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에 온 우리들 첫 순간의 숨은 날숨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호흡은 들이마실 흡(吸)입니다. 우리들 마지막 순간의 숨은 들숨입니다. 이 세상에 온 아기가 처음 터트리는 울음은 날숨의 커다란 비움인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무수한 일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태풍 마이삭으로 인한 피해 복구가 미쳐 끝나기도 전에 북향하고 있다는 태풍 하이선 소식에 모두들 한동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시행한 후 다시 일주일이 더 연장이 되고 있는 이 와중에 들려오는 의료 파업과 이웃을 등지고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일부 교회 등 어지러운 소식들은  한순간도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태풍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위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태풍과 내 안에서 한데 뒤섞이어 쉼없이 서로 충돌하며 끊임없이 일으키는 생각의 소용돌이는 마치 내면의 태풍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순간 뭉쳐져 태풍이 되기도 하고 온화하게 흘려 보내어 순풍이 되기도 하고, 겸허한 물방울이 되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잠겨 마음에 홍수가 나기도 하고, 무심코 쌓아두고 참았던 둑이 한순간 무너져 소중한 이에게 불같은 화를 쏟아내고야 마는 우리들 내면의 풍경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를 스쳐 지나가는 대상과 현상과 자연은 나를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거울이자 고마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몸을 받아서 태어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구별에서 사랑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터전으로 삼으며, 내가 이 땅에 온 이유와 목적을 거듭 헤아리곤 합니다. 그 순례자의 여정에 다정한 벗이 되어주는 어둔 밤하늘의 먼 별과 꽃은 언제나 온전한 아름다움이 분명 있다며 우리에게 소리없는 소리로 말없는 말로 그 존재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헤아림으로 비추어 보는 우리 내면의 속뜰은 별과 꽃 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인 진리를 이미 씨앗처럼 공평하게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저에게 있어서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언제나 살아 있어서 잠잠할 줄을 모릅니다. 마치 우리 몸에서 숨이 끊어진 적 없듯이, 한순간도 생각이 멈춘 적 없듯이, 태초에 불어넣어 주신 내면의 바람 즉 숨은 곧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가슴 떨리는 증거입니다. 


그 와중에도 우리를 스쳐 지나는 온갖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태풍에 날려가지 않도록 내 몸과 마음과 의식에 고삐를 매어 주는 자율 방편이 바로 호흡인 것입니다.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는다면 호흡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도 입의 말도 크게 도리에 어긋날 정도로 거칠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순간 태풍의 눈이 될 수도 있고 평화의 눈이 될 수도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자율 장치가 바로 호흡인 것입니다. 


나 한 점으로부터 출발하는 평화의 눈이 되기 위한, 호흡을 잘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들숨보다는 날숨을 더 오래 천천히 길게 내쉬는 것입니다.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조금씩 길게 낮게 내쉬는 마지막 숨 끝까지 바라보며 알아차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저절로 따르는 들숨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기쁨과 감사의 샘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깊이 내쉬는 그 깊이 만큼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들숨인 것입니다. 


한 점 끝까지 숨을 내려놓으며 나를 비운 만큼 저절로 채워지는 들숨은 저절로 부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란 채움보다는 비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에게 채워주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로의 말처럼 자연은 모든 생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너희는 멈추어 하느님을 알기 위해, 먼저 나를 비우라 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 비움이 날숨과 다르지 않기에 이미 우리 몸에 주어진 생명의 호흡과 자유 의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먼저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호흡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기도의 시간이 곧 비움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걷거나 앉거나 때론 멈추어 가만히 호흡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런 공평하고 평범하게 주어진 호흡 가운데 내게 선물로 주신 자유 의지로 조절하는 평온한 숨으로 이어지는 평온한 발걸음일 수 있다면 세상은 한발짝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새벽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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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성이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78)


규성이 엄마


작실에서 내려오는 첫차 버스에 규성이가 탔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 규성이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감기가 심해 원주 병원에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엊그제 들에 나가 고추며 참깨를 심었는데, 점심을 들에서 했다고 합니다. 솥을 돌 위에 걸고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인 것이지요. 먼 들판까지 점심을 이어 나르기 힘든 것도 이유였겠지만, 시어머니며 남편이며 몇 명의 품꾼이며, 어쩜 일하시는 분들께 따뜻한 점심을 차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댁인 규성이 엄마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어린 규성이는 밭둑 위에서 혼자 버둥거리며 누워 있어야 했는데 흐리고 찬 날씨, 감기가 되게 걸린 것입니다. 어린 규성이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어린 아들 측은히 안고 가는 엄마의 아픔이 내겐 더 컸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농촌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선한 이웃 청년과 자신의 삶을 합하고, 맏며느리로서 적지 않은 살림 구김 없이 꾸리는 규성이 엄마. 어린 자식 감기 걸린 게 못난 자기 탓이라는, 제발 그런 생각은 말았으면, 규성이 엄마를 바라보며 사정하듯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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