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을 비운다면

  • 인우재가 무엇인가?궁금해서 인터넷 검색해보니 목사님께서 15년 주님을 섬기며 살던 고향집 같은 곳이라고 나오네요!

    별을 품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17 09:38
  •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는 집이지요.

    별을 넉넉히 품을 수 있기를 빕니다.

    한희철 2019.09.17 17:54
  • 늘 별을 품고 살길 원하며 아이와같이 되길 원해요

    김아리 2019.09.17 22:45
  • 늘 별을 품길 원하며
    아이와 같이 되길 원합니다.

    김아리 2019.09.17 22:4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1)

 

두 손을 비운다면

 

해마다 추석 명절이 되면 식구들이 인우재에서 모인다. 길이 밀리기 일쑤고,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하고, 씻을 곳도 마땅치 않고, 화장실도 재래식,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불편을 불편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단강에 누우셨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도리인 셈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어둠 속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캄캄한 뒤뜰에 파란 불빛이 날았다. 개똥벌레, 반딧불이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언제 봐도 신기하고 신비롭다. 세상에 저런 춤이 다 있구나, 웃으며 바라보다가 가만 다가갔다. 춤사위 앞에 두 손을 펴니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손 안으로 든다. 순간 나는 별을 두 손에 담은 소년이 된다.


“어머, 신기해라!”
“어디서 빛이 나지?”
“생각보다 크네.”


식구들이 한 마디씩 한다. 마당 끝으로 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반딧불이를 하늘로 날리자 다시 빛의 춤을 추며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함께 했던 짧은 시간에 대한 소감일까, 모스 부호 같은 불빛은 무슨 의미일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욕심을 버려 두 손을 비운다면 보잘 것 없는 우리네도 별을 품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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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사랑하면 보인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1)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태복음 16:1-4)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함께 주님께 왔다. 무심히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쑤 대립하기도 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경건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전통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손을 맞잡았다. 공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유대교 세계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은 예수를 함정 속으로 유인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표징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하다.

 

표징을 보여주면서 자기 말을 따르게 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자신들에게만 귀속시키면서 다른 이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한다. 지배는 곧장 욕망 채우기와 연결된다. 표징을 보이면서 순진한 사람들에게 재산이나 몸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지 않던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의 표징 요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 싶다는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면서 자신을 입증하려 하는 사이비 종교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가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다. 병든 사람들이 나음을 입고,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친교의 식탁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 말고 다른 표징이 더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려는 마음이지 표징이 아니다.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때때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눈이 있다고 하여 다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 하여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볼 마음이 있다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들을 마음이 있으면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열네 살 연상인 루 살로메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런 사랑의 시를 썼다.

 

“내 눈을 감기세요./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내 귀를 막으세요./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 오시는 시간이다. 세미한 중에 들려오는 그 말씀을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다. 거기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리에만 반응한다. 전락이다.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 달라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너희는 하늘을 보면서 일기는 분별할 줄 알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 줄은 알지 못하고 있구나.’ 제법 똑똑한 척하고,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기도

 

하나님, 자기 의에 충만한 우리는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휘황한 것들에 익숙한 눈은 세상에 깃든 영원의 흔적을 보지 못합니다. 소란스런 소리에 익숙해진 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눈이 없어도 들을 수 있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거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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