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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출간 책 서평

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by 한종호 2017. 7. 7.

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이 책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30여 명을 불러내어 오늘의 독자와 다시 대면시킨다. 초고를 보고 반가웠다. 퍽 오래 전이긴 했지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말이 없는 한 여성”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변호하고 그의 남편 호세아를 호되게 나무란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변호했던 성서의 여성들이 김순영 박사에게 새롭게 초대받아 새 변호인의 변호를 받으며 다시 활기차게 살아나고 있고, 성경 독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1889-1966)의 <롯의 아내>라는 시가 있다. 고향 소돔을 떠나게 하는 천사의 강제이주 명령은 잔인하다. 도시를 떠나는 자가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죽고 만단다. 그러나 천사의 말에,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에 여인은 순종할 수 없다.


“고향 소돔의 붉은 탑/ 노래 부르던 광장/ 뛰어놀던 뜨락/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낳던 곳/ 가족과 함께 살던 집/ 텅 빈 집에 매달린 열린 창문”을 끝내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이 여인을 두고서, 원하지 않았던 이주를 체험했던 러시아의 시인은 절규한다.


누가 이 여인을 위해 슬퍼할까/ 조금이나마 그녀의 상실감을 생각해 줄 이 누구인가/ 잊을 수가 없구나/ 순간의 시선에 삶을 바친 그녀를!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역시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다. 그는 롯의 아내가 떠나온 집을 멀리서나마 되돌아 볼 수밖에 없었던 떳떳한 이유를 무려 서른 가지가 넘게 나열한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폴란드의 시인은 추모한다. 결국 이 착하디착한 여인은 애향(愛鄕)과 강제이주에 저항하여 살던 곳만 바라보고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고.


우리나라의 시인 이향아(李鄕莪, 1938-)는 롯의 아내를 추모하면서, 제목을 아예 <돌아다보리>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다보리/ 취한 밤의/ 검은 물이랑처럼/ 망해가는 세상의/ 향내나는 손길/ 내 이름 불러서/ 나는 못 가리/ … 벙어리처럼 두 팔 쳐들고/ 돌기둥/ 소금기둥/ 서서 죽으리




이제 우리 앞에 김순영이 나타났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 정경으로서의 구약본문에는 억압의 굴레를 탈피하고 자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의외성(意外性)이 존재했고,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 목소리들이 숨통을 열어주곤 했다. 강자의 목소리가 진리가 되는 어제와 오늘의 타락한 질서에 해독제를 살포한 것 같은 고대 이스라엘 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불편한 지적(指摘)질’을 하게 되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것은 사소한 트집이 아니다. 거기서 질문이 생기고,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나의 글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부디 끝까지 읽고 ‘안전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르게 읽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저자가 비록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더라도 독자들은, 특히 남성 독자들은 방심해선 안 된다. 놀랄 일이 벌어지고, 몰랐던 것에 눈이 뜨이고, 여성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 할 것인지를 발견하는 이들은 남자로 여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서 여성 주역들의 이름을 지우려하는 남성들이 어쩌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끈질긴지 암담하다. 저자는 드보라 이야기를 기독교 여성의 지도력 문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길잡이로 제안한다. 왜 기독교만이겠는가? 여성 국방부장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다.


다말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우리말 번역 성경의 번역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일반 창녀를 말하는 히브리어 ‘조나’와 제사(祭祀)에서 성행위(性行爲) 의식을 연출하는 신전창녀인 ‘크데샤’를 구별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독자의 알 권리를 지켜준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성경 번역에서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저자는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한 말 중에 여성비하 발언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말 번역만으로는 그것의 심각성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저자가 히브리어 본문의 맨 뜻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언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지배계급에 속한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짓밟혀 전리품 취급당하는 여성들의 운명을 당연시한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의 평범한 어머니의 말이 아니다. 그녀는 특정한 신체 부위를 지목하며 여성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한두 처녀”라는 표현은 거친 군사들의 희롱하는 말로서 “한두 개의 자궁”을 순화시킨 말이다. 구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여성이 남성 영웅들의 탈취 대상이었던 증거다.


사사기 5장 30절 히브리어 ‘락함 락하마타임 르로쉬 게베르’(“a womb or two for each man”)가 들어 있는 본문의 대강의 뜻은 “사내놈들마다 처녀(혹은 여자) 한 둘은 차지했을 것이다”이다. 아마도 성경에서는 이렇게 밖에, 달리 번역할 수가 없다. 어느 언어, 어느 성서 번역도 여성 성기를 직접 일컫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적 정상성(nomalcy)은 경전 번역에서 이러한 저속한 표현은 완곡어법으로 처리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번역판들의 완곡어법이 지닌 문자적 뜻이 실제로는 “심히 저급한 표현”임을 과감하게 지적한다. 이것은 저자의 공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저급한 표현임을 지적한 것만이 아니고 번역에서 이 본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지금처럼 완곡어법으로 표현할 것인지, 각주에 본문의 뜻을 사실대로 밝힐 것인지, 그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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