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6)


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던 구약학 전공자가 한 초등학교를 들렀을 때 받았던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스라엘 초등학생들은 4학년 정도가 되면 모세오경을 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구약성서 전체를 암송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전공자인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면서 이제부터 성서를 외워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비장한 태도가 내심 거슬린 나는 슬그머니 조선시대에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절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줄줄이 꿰었던 이들이었다고 말했다. 암기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실천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답했다.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사를 맡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신으로 가서 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외운 것이 많아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 《논어》, 〈자로〉5절


공자께서는 중국내에서 회자(膾炙)되는 그리고 의미 있는 시(詩) 305수를 모아 분류하고 편집하였다. 고도로 압축된 의미를 단어 속에 담아두고 비유법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이 시문장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무수한 일들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를 파악하는 일로부터 사람들에게 임무를 주고 그것을 점검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든 일들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라는 것이 언어로 시작하여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 역시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설득과 계약 그리고 다툼과 쟁론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시구를 줄줄 외우면 언어에 대해 통달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능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공자는 문장을 모조리 외운다고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다. 이들 문장이 지닌 의미를 깊이 파악하여 그 문장대로 살아가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는 의미를 밀도 높게 압축해놓은 시(詩) 구절로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주고받는 것을 매우 고상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온다는 소식이 접수되면 임금은 한시(漢詩)로 응대할 수 있는 학자를 수소문했다. 조선의 한시 수준이 중국에 비해 대단히 저급하다고 자책했고, 실제로 중국 한시를 듣고 응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이 71세 때 지은 시 〈노인일쾌사 6수 - 효향산체〉에서 ‘노인이 되어 즐거운 일 중의 하나는 붓 가는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한자의 운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까다로운 중국의 율과 격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장쾌히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어는 종종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언어에 의해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언어의 예속 사슬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비평작업이다. 비평은 언어 속에 감추어진 독재성과 억압성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저 문장을 달달 암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언어의 힘은 문장력에 있지 않다. 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언어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언어가 힘을 얻는 것은 언어가 그대로 실행될 때 힘을 갖는다.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관념 형태의 언어가 삶 속에 구체화될 때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면서 ‘말씀(로고스)’라고 정의했다.


헬라어 ‘로고스(logos)’의 원래 의미는 ‘말’ 또는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결속을 이루고, 언어의 구별과 차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 분열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언어다’라고 정의했을 때 쏟아졌을 반향을 우리는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예수를 괴롭혔던 대표적인 사회계층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리새인이다. 이들은 경건주의자로서 구약의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이다. 구약을 모조리 외우는 이들이었고, 그것을 해설했던 탈무드와 관례까지 정통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토라)은 곧 문화였고 역사였고 언어였다. ‘예수가 언어다’라는 은유는 예수가 율법 그 자체라는 선언이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 20~22절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해 물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답했다. 청년은 어느 계명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그 모든 계명을 모두 다 철저히 지켰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모두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율법이 지닌 심층적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율법의 능력은 읽기나 암기 또는 형식적인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천으로부터 야기(惹起)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배드민턴을 즐긴 적이 있다. 빠른 몸놀림이 매력적으로 보여 배워보고자 했다. 라켓을 사고 셔틀콕을 샀다. 그리고 배드민턴에 관한 서적을 몇 권 구입했다. 기본자세로부터 역사와 규정, 다양한 기술들을 책을 통해 섭렵해나갔다. 누구와 배드민턴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지닐 수 있었다.


몇 번의 연습을 하고 이제 입문한지 얼마 안 된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과 코트에 마주섰다. 부지런히 사방 뛰어다녔지만 몇 점 획득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그득한 지식들이 몸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지식을 터득하거나 적어도 몸과 머리가 동시에 습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학(學)은 정보 또는 지식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은 몸이 정보나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만 반복적으로 하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몸을 사용할 뿐이다. 학(學)에만 몰두하면 머릿속에서 지식이 맴돌다 또 다른 이론만 생산해낼 뿐이다. 신앙은 이론만도 관습만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온전한 학습이요 공부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0) 2017.03.13
별을 헤아리는 까닭  (0) 2017.03.02
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0) 2017.02.23
무엇을 걱정하는가  (0) 2017.02.14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0) 2017.01.30
인생의 비밀  (0) 2017.01.18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