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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아비가일, 아름답고 총명하고 노련했다

by 한종호 2016. 11. 23.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15)

 

아비가일, 아름답고 총명하고 노련했다

 

다윗에게는 아름답고 총명한데다 용감하고 민첩한 아내가 있었다. 한때는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다(사무엘상25장). 때는 주전11세기 사울 왕의 통치 시대였지만, 이미 그의 시대는 기울고 있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던 끝자락에서, 그는 다윗이 차기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을 시인했다(24:20-21). 이즈음 사울을 왕으로 세웠던 예언자 사무엘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이 있었다. 이후 다윗은 시내 반도 북쪽 바란 광야로 이동한다(25:1).

 

이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은신처로 이용한(23:24) 마온에는 큰 재산가 나발이 살고 있었다. 그는 목초지 갈멜에서 양 삼천 마리, 염소 천 마리의 털을 깎고 있었다(2절). 그는 갈렙 족속의 사람이고,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두었지만, 완고한데다 행실이 악한 사람이었다(3절). 다윗은 마온 광야에서 나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4절). 그는 나발에게 자기 사람들을 보내 양떼를 보호해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후원을 요청했다(6-9절). 그러자 나발은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라는 말로도 부족했는지 다윗을 주인 떠난 일꾼 취급하며 무례하게 제안을 묵살해버렸다(10-11절).

 

다윗의 사절단으로 나발에게 갔던 자들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자(12절), 다윗은 칼을 찬 400명을 데리고 나발을 치러간다(13절). 다윗의 분노가 또렷이 드러난 셈이다. 무력적인 행동태세를 취한 다윗이 위태로워 보인다. 나발의 무시에 분노가 치밀었을 다윗, 그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때 나발의 하인들 중 한 명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윗이 보낸 사절단에게 주인 나발이 모욕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14절). 왜 하인은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에게 보고했을까. 집안일의 책임이 아비가일에게 있었음은 물론이고 평소 여주인의 일처리 능력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인은 아비가일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한다. 그동안 다윗의 사람들이 밤낮 양치는 사람들의 담이 되어주었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주인 나발이 “불량한 사람”이라서 말해야 소용없다는 듯 보고했다(15-17절). 주인 나발이 불량배나 다름없다는 평가다. 하인의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마음이 바빠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황급히 빵과 포도주, 고기, 곡식 등의 먹거리를 준비해서 하인들 편에 보낸 후 나귀타고 뒤따라간다(18-19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아비가일을 향해 내려오던 중이었고, 그들은 마주쳤다(20절). 다윗은 나발이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 생각으로 나발 집안을 몰살시키겠다고 맹세한 상황이었다(21-22절).

 

다윗 일행을 만난 아비가일은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렸다(23절). 그녀의 신속한 상황판단만큼 행동역시 민첩했다. 그녀는 자신을 “당신의 여종”으로 낮추고, 다윗을 “나의 주인”으로 높여 부른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를 달래기라도 하듯 남편의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자기 남편은 “불량한 사람”이고, 이름처럼 “미련한 사람”이니 개의치 말라고 한다(24-25절).

 

 

 

그리고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내 주의 손으로 친히 보복하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26절).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에게 폭력의 칼을 휘두르려고 했던 다윗의 마음을 짚어주면서 동시에 남편을 욕해준 셈인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윗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윗 왕권의 수립을 예고하듯 여호와께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입니다”라고 축복한다(28절). 그녀는 자기 남편의 무분별한 말을 주워 담아 다윗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준 셈이 되었다. 아비가일의 말은 한걸음 더 나간다. “사람이...내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29절). 이 말은 오랜 시간 사울의 추적을 피하며 고된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다윗을 향한 위로다.

 

아비가일의 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넘어 다윗이 무죄한 피를 흘리거나 보복하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남기면 안 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여호와께서 내 주를 왕으로 세우시는 날이 오면 “당신의 여종을 기억해주세요”(31절)라고 말하며 자신의 안위를 부탁한다. 아비가일은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고 다윗을 “나의 주”라고 높여 부르지만, 말의 주도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 설득되었다. 다윗은 피의 복수극을 막은 아비가일을 축복한다(33-34절). 그녀의 호소력 넘치는 말들은 남편 나발과 대조적인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각인시킨 것은 물론이고 지혜로움과 직관력을 돋보이게 했다. 결국 그녀의 민첩한 행동과 지혜로운 말은 피로 얼룩질 폭력과 집안의 몰살위기를 막았고, 다윗의 임박한 왕권수립을 예고했다.

 

이후 아비가일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묵살했던 나발은 마치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만족함에 흠뻑 취해 있지 않은가. 아비가일은 그런 남편에게 아침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36-37절). 나발은 자기 집안을 향한 복수와 죽음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노심초사했을 지혜로운 아내와 달랐다. 아비가일은 남편이 술에서 깬 후에야 있었던 일들을 말한다. 그러자 나발은 “심장이 멎고”(새번역; “낙담하여”, 개역개정), 돌처럼 되었다(37절). 히브리말 “마음”과 “심장”은 같은 형태의 단어다. 아마도 돌발적인 심장질환으로 임박한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셔서 죽었다”(38절)라는 한 마디는 죽음의 직접적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 결국 다윗의 복수를 하나님이 갚으신 셈이 되었다.

 

다윗은 나발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서 여호와가 자기의 모욕을 갚아주셨다며 찬양한다. 그리고는 재빨리 아비가일에게 사람을 보내 청혼한다(39-40절). 아비가일은 다윗이 보낸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서둘러 나귀타고 떠나 다윗의 아내가 된다(41-42절). 다윗과 아비가일의 신속한 결혼이 좀 의아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비가일의 행동은 다윗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재빨랐다. 그녀는 “급히” 음식을 준비했고(18절),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렸고(23절), 다윗의 사람들을 맞이하고는 “급히” 일어나 나귀를 탔다(42절). 그녀의 민첩한 행동이 다윗을 감동시켰을 테지만(34절), 궁극적으로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은 다윗의 왕권수립과 안정을 준비하는 요긴한 자원이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내 사울의 딸 미갈처럼.

 

아비가일은 많은 재산을 소유한 과부였고, 다윗에게 그녀의 재산은 그의 군대를 위한 재정적 필요를 채워주었을 것이다. 이뿐인가. 강력한 갈렙 족속과의 혼인은 현실적인 정치적 힘을 획득하는 터전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즉위식이 있기까지 그녀를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27:3; 30:5; 사무엘하2:2; 3:3)이라고 부른다. 하여 사무엘상 25장 나발-아비가일-다윗 이야기는 남성중심적인 정치적 이익의 의도를 교묘히 폭로하면서 동시에 남편의 권위에 갇힌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주체적인 여성의 가치를 드높인 본보기였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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