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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소리의 신학자이자 소리의 철학자이십니다

by 한종호 2016. 10. 25.

목사님은 소리의 신학자이자 소리의 철학자이십니다

 

 

1994년 이후 가장 덥다는 이 여름에 건강하신지요? 최근에 출간된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읽었습니다. 잠시 조용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머리말에 해당하는 ‘초대의 글’에서 지금까지 즐겨 읽어 온 편지 형식의 작품들을 소개해주셨더군요. 전설로 남은 12세기 중세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서 시작하여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본회퍼의《옥중서간》, 그람시의《옥중수고》, 문익환 목사의《꿈이 오는 새벽녘》, 서준식의 《옥중수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또 읽는’다고 하셨지요. 재작년에 타계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추모 음악회에서 그의 절친 브루노 간츠(Bruno Ganz)가 ‘빵과 포도주’를 낭송했기 때문에 목사님이 소개하는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히페리온》은 더 반가웠습니다.

 

 

 

목사님의 이번 책은 제게 특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지’라는 성서 본문의 의미 파악이나 실용적 효과 그 이상을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편지’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혼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던 교회 공동체가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흔들릴 때마다 그는 편지를 써서 벗들과 소통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의 서신은 곡진하고, 열정적이고, 애정에 가득 차 있다. 그의 편지를 회람하면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구부러진 길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6쪽)는 정도의 설명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편지란 우리 “영혼이 발하는 발신음”(5쪽)이어서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게 마련”(6쪽)이고, 따라서 ‘오늘의 나라고 하는 편지는 또 다른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거나 불쾌한 소식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목사님은 또한 수십 년 전 부친께서 “호롱불 밑에서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신” 편지가 곧 아버지의 존재이자 “아버지의 품”이었다며 그 편지를 “고향의 냄새”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4쪽). 프란츠 카프카를 비롯한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평생을 아버지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사실을 알기에 부친에 대한 목사님의 고백에 놀랐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아버지의 편지가 한 통도 남아 있지 않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그래서 더 뜻밖이었습니다. 주옥같은 편지를 지금 갖고 있지 못한 이유가 혹시 아버지의 편지가 곧 ‘고향의 냄새’이자 아버지의 존재 자체였다는 의식이 어려서는 흐릿했기 때문이었는지요.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이해는 목사님께서 읽은 성서와 여러 작가들이 쓴 편지가 새롭게 형성한 것인지요.

 

어떤 책인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읽으면서 저는 몸 속 깊게 가라앉아 잘 보이지 않았던 욕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함과 진부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고(306쪽), “제거할 수 없는 아픔은 품고 가는 수밖에” 없고(316쪽), ‘순례자는 길을 잃을 권리’가 있고(221쪽),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잠시나마 고독 속에 머물러야” 하며(373쪽), “흑과 백으로 갈리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회색빛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37쪽)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그동안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신앙과 도덕을 요구하는 무섭고 매정한 당위의 말들에 꽤나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은 이런 공감과 위로의 말들이라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은 가족들이 모일 때 서로 어린 시절의 흉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면서 “스스럼없이 그 시절을 회상하는 일이야말로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일종의 의례”(201쪽)라고 하셨습니다. 그 문장을 읽으며 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어른들 중 누구도 ‘흉보기’의 긍정적 측면을 이렇게 포근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어린 시절을 흉내 내며 깔깔거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청파교회 교인들이 부러웠습니다.

 

48가지 소리가 들려주는 우주의 장엄한 교향곡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였습니다. 이 글은 제가 읽은 목사님의 글 중에 최고였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라는 전제를 서둘러 붙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글을 과연 쓰실 수 있을까요? 저는 없을 것이라는 데 걸겠습니다. 목사님께 그럴 능력이 없으시다는 뜻이 아니라 소리에 대해 이 정도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할까 싶기 때문입니다.

 

200자 원고지 20여 매 분량의 길지 않은 편지에서 목사님은 48가지의 소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하셨습니다. 시계·자동차·라디오·경적‧옥외 스피커‧층간 소음이나, 정치가의 호언장담‧종교인의 ‘큰 소리’‧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절규 등을 뺀 나머지는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다음은 긴 인용의 충동에 시달릴 만큼 생생한 목사님의 소리입니다.

 

아궁이에서 솔가리가 탈 때 나는 소리, ‘자작자작’, 밀짚을 태울 때 나는 소리, ‘타닥타닥’, 군불에 묻어두었던 밤 껍질이 터지는 소리, ‘탁탁’, 댓잎을 스쳐온 바람소리, ‘사르륵사르륵’, 솔숲을 거쳐 온 바람소리, ‘솨아솨아’, 비가 그친 후 혹은 볕이 나 지붕 위에 있던 눈이 녹아 내려 섬돌 위에 떨어지는 소리, ‘똑똑똑’ … 닭이 홰치는 소리, 솔개 그림자가 마당귀를 스치면 ‘구구구구’ 소리를 내며 새끼들을 불러 품에 안던 암탉 소리,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린 동녘 하늘을 향해 ‘꼬끼오’ 하고 울어 새벽을 깨우던 수탉의 울음소리, 한낮의 무료함을 깨뜨리려는 듯 혼자 ‘컹컹’ 짖는 누렁이 소리(69-72쪽).

 

목사님은 그런 연후에 21세기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힌 산업화 이전의 아날로그 세계로 독자들을 데려갑니다. “나무 방망이와 다듬잇돌과 피륙이 이루어내는 리드미컬한” 여인들의 다듬이질 소리, “이불 호청이나 큰 빨래를 둘이 마주잡고 ‘쫙쫙’ 펴는 소리, 다림질하기 위해 입에 머금은 물을 ‘푸푸’ 옷에 뿌리는 소리, 밤이면 벽간에서 울려나던 귀뚜라미 소리에 시선을 돌리게 만드셨습니다.

 

48가지를 섬세하게 묘사해 내신 것도 대단하지만 저를 더 놀라게 한 건 언어도, 말씀도,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시편 19:3) 세상 끝까지 퍼진 하늘의 소리에까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방문했던 베를린 레기나 마르티눔 성당을 회고하실 때는 “자연 조명과 인공조명이 절묘하게 뒤섞인 공간”의 성스러움에 숨이 막힐 것 같은 감동을 느끼셨다고 했지요(79쪽). 성서에서 들려오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절규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추셨을 뿐 아니라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폭력적으로 추방당한 작은 소리들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겠다는 다짐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75쪽). 세계에 있는 모든 ‘초월자의 암호’(카를 야스퍼스)를 읽어내고 그것을 해독해 낼 능력을 갖추게 될 때 우리네 심성이 회복된다고도 하셨습니다(53쪽). 작은 것들을 보려면 자꾸 멈춰 서야한다고 하셨지요. “멈추어 서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의 시작”이고 “생명 사랑이란 언제나 작은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과라고 말입니다(281쪽). 세상의 어느 특정한 소리에 편향되지도, 제멋대로 세상의 장엄한 소리들 사이에 위계를 정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목사님은 소리의 신학자이자 소리의 철학자이십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누구도 간파하지 못했던 자연의 오묘한 이면

 

이제는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가 왜 명문인지에 대해 마지막 이유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사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나 까마득해진 옛날 사람들의 모습은 시골의 촌로들이 목사님보다 더 잘 알지 모릅니다. 차별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비정규직이나 성소수자들을 위해 투쟁하는 시민운동가들이 더 세밀하게 들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미술이나 음악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들려주는 48가지 소리에 흥분하는 것은 우주의 장엄한 교향곡이 다름 아닌 목사, 그것도 서울의 중형교회 담임목사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나 시민운동가나 생태주의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된 목사가 하찮게 여겨지던 소리들을 본래의 자리로 복권시켰기에 탄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목사님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클래식 콘서트홀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생각이 났습니다. 말러는 제자 브루노 발터와 숲속을 거닐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장터 소리, 군악대 소리를 듣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소리 들리나? 저것이 바로 폴리포니(대위법적 음악)이며, 내가 폴리포니를 이해하는 방식일세! … 예술가의 일이란 이러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통일하는 것일세.

 

음악 학자들 가운데는 말러의 교향곡 3번을 가리켜 “천지창조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향곡이란, 특히 3번 교향곡이란 “모든 기술적인 수단을 강구하여 세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말러는 3번 교향곡을 6악장으로 구성하면서 목장의 꽃들, 숲속의 동물들, 인간들, 천사들, 그리고 사랑이 말러에게 던질 말들을 음악화 했던 것입니다.

 

말러가 의미하는 자연은 좀 독특하기 때문에 주의를 요구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을 말할 때 “오로지 꽃이나 작은 새들이나 수풀의 향기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왜 자연에 디오니소스나 위대한 목신 판(Pan, 목신)과 연관 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교향곡 3번에서 말러는 “끔찍하고 위대하고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운 그 모든 속내를 숨기고 있”는 자연, 누구도 간파하지 못한 이 오묘한 자연의 이면을 파고들었습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든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소리”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스또엡스끼를 멘토 쯤으로 받들던 말러는 “이 땅위에 피조물이 아직 하나라도 고통 받고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란 근원적 질문에 답하려 했던 음악가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숲 걷기나 등산 같은 강도 높은 운동을 좋아했지만 생의 말년에 심장에 문제가 생기자 의사는 격한 운동을 금지시켰습니다. 평생 “책상에 앉은 채로만 작곡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짧고 가벼운 산책만 하라는 의사의 요구에 말러는 낙담했습니다. 운동을 할 수 없어 자신이 원하는 작곡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생 최대의 불행”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목사님과 말러 사이에는 물론 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누구도 간파하지 못한 자연의 오묘한 이면에까지 들여다보며 모든 피조물의 고통에 반응하려 했던 말러와 목사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작지 않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는 저도 “해야 할 일 혹은 성취해야 할 목표를 인간관계의 중심에 두는 이들”(55쪽)에게 느낀 극심한 피로감만 불평할 게 아니라 “세상의 미세한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늘에 주목”(53쪽)하겠습니다. 그렇게 자본주의 세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마련된 성소(161쪽)에 더 자주 몸을 맡기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양화진’에서는 매미들의 우렁찬 합창이 계속되었습니다. 매미의 합창 소리는 너무 커서 소음처럼 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양화진의 매미들은 왜 솔로가 아니라 합창을 좋아하는지, 합창을 하되 왜 포르티시모로 울어대는지를 관찰해 보겠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이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까진 못 본다 하더라도(116쪽), “사소한 것들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만나거나(304쪽), 그것도 어렵다면 목적 없는 무위의 놀이를 통해 욕망의 포박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 줄 누가 알겠습니까(102쪽).

 

언제 한 번 양화진으로 놀러 오세요. 함께 듣고 싶은 음악이 많습니다. 목사님의 평안을 빕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편집자 주/ 이 글은 김기석 목사의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에 대한 35명의 응답을 묶은  <<희망 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에 실린 글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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