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시대의 진정한 신랑 찾기

 

 

여성혐오 시대의 진정한 신랑 찾기

- 마르다 마리아 퍼즐 맞추기 -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문서이자 경전(經典)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각 사람의 저자가 자신의 수신자(공동체)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예수의 복음운동의 내력과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과 해설, 곧 설교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예수의 언행이지만 자신의 저술 목적(공동체의 현실)에 따라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요리한 측면이 있다. 순서와 세부적인 내용, 그 속에 들어있는 핵심이 약간씩 달라진 이유가 거기 있다. 네 개의 복음서를 다 가진 우리는 이러한 흩어진 이야기들을 통합해볼 필요에 직면한다. 같은 사실(근거, fact)에 대한 제각각의 기록이 전체 복음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련된 사실들도 그 혼란이 심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정리가 필요하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각별히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집안이 있다면 마르다와 마리아(그녀들의 오빠(혹은 남동생) 나사로를 포함하여)네 집일 것이다. 이 정리를 통해 그녀들이 누구이며, 예수와 어떤 관계이며, 예수의 복음운동에 있어 그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복음서에서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나아가 예수의 복음운동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해 보려고 한다.

 

죄에 자기 몸을 바친 한 여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누가복음 7:36-50)

 

이 기록의 시간대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시기에 해당한다. 이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몸을 일으키셔 가버나움으로 향하고 계셨다. 유대의 북쪽 변방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직후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으로 밝혀져 있다. 바리새인 시몬이 살고 있는 동네에 ‘죄를 지은 여인(죄에 자기 몸을 바친 여인)’이 살았다. 그 죄가 창녀의 업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그 동네의 유명인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어린아이들도 그녀를 ‘죄인’이라 불렀을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동료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던 그녀가 예수의 복음(아마도 가난한 자에게 선포하신 복음)을 들었다. 어느 날 결심하고 바리새인의 집까지 들어와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 향유는 혼례와 장례 때 쓰는 기름이다. 그녀가 왜 이런 향유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녀의 직업이 설명해 준다. 그녀는 그것을 다 쏟아 허비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신랑을 맞아 신혼을 꾸린 삶과도 같다. 그 기념으로 향유를 부은 것이다. 설명이 필요치 않은 복음의 그림, 천국의 장면이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과 마을 사람들은 예수의 선지자됨을 의심하며 속으로 수군댔다. 예수는 그녀에게 당당한 죄 사함을 선포한다. 곧 율법이 정한 정죄를 풀어 그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누가복음 8:1-5).

 

막달라(Magdalene)는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는 도시다. 북쪽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그 지방 유력한 사람들(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후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열 두 제자와 함께 가장 먼저 거명된 인물이 ‘막달라에 사는 마리아’라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누가는 ‘일곱 귀신이 나간 자’라는 수식을 붙인다. 왜 그랬을까? 마리아는 당시 흔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복음운동의 이력을 밝혀줌으로써 그녀가 어떤 마리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일곱 귀신이 나감으로써 예수의 복음운동에 헌신하게 된 막달라의 마리아다. 일곱 귀신이 나갔다는 말은 그녀의 병이 일곱 가지나 됐다는 의미일 것이다.(누가의 직업은 의사였다)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부유한 집안의 안주인이었으나 도저히 고칠 수 없는 회복불능의 지병을 앓고 있던 마리아. 그녀가 왜 예수께 이토록 헌신적이 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함께 거론된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같은 여인들보다도 먼저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녀의 헌신이 특별했거나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50대 정도는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도 나이고 재력도 재력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예수를 향한 일관된 헌신이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마가복음 16:1-3).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마가복음 1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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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는 최후까지 예수를 따랐고 변함없이 그를 후원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그녀의 역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해가 교회 안에 널리 퍼져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찬송가 211장 1절)

 

사람들은 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이자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그 마리아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복음서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고 향유를 부은 그 죄인이었다는 근거가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막달라 마리아와 창녀 마리아는 우선 출신지에서 차이가 난다. 막달라는 유대의 북쪽(갈릴리 바다의 서쪽 기슭으로 가버나움의 남쪽)에 있다. 그러나 한 때 창녀였던 마리아가 살던 곳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었다.(뒤에 밝혀진다.) 또 그들은 연령대에서도 차이가 난다. 재력에서도 차이가 난다. 당연히 신분상에도 차이가 난다.

 

이러한 오해가 벌어진 가장 근접한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누가가 죄인인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인용했기 때문이다. 마치 갈릴리와 가버나움 근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지방에서 가까운 막달라의 마리아가 등장했는데, 그녀는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자였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일곱 귀신과 창녀의 더러운 삶이라는 이미지가 혼합돼 버렸다. 그 결과 막달라 마리아는 나이는 젊어지고 신분은 사실과 달리 미천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었던 젊은(‘어린’이 더 적당할 것) 처녀가 자신의 재력으로 예수를 끝까지 후원했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요한복음에는 이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한복음 8:3-5)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에피소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서기관 바리새 종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를 궁지에 몰아 고소하려고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음행하다 잡힌 여자(창녀)를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웠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율법을 지킬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지킨다면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하니 그간 너의 사랑의 가르침이 거짓이 되고, 살려야한다면 너는 율법 파괴자로 즉각 고소당할 것이다.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허를 찌르는 말씀으로 그 둘 사이를 비켜나가신다. 기억할 것이 두 가지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점과 예수님 사역의 전반기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이다.

 

베다니는 이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한촌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주인공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그녀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살던 곳이다. 오라비가 오빠를 말하는지 남동생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헬라어 원문 ‘아델포스, ἀδελφὸς’는 단순히 남자형제를 가리킨다. 우리말에서 오라비는 일반적으로 남자형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특히 남동생을 가리킬 때 ‘오랍동생’(김소월 「접동새」에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누나가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접동새가 되어 운다는 얘기가 나온다.)이라고도 쓴다. 여러 면에서 나사로가 그녀들 집안의 중심인물(오빠)이라기보다는 남동생(그것도 아직 어린)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즉, 마르다는 이 집안의 장녀이자 가장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과 나사로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면 마리아는 누구이고 나사로는 누구일까?

 

마리아를 찾아서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한복음 11:1-2).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요한복음 11:5).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복음 12:1-3).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 우선 이 집의 위치는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가난한 촌락 베다니다. 우리는 고대 서울의 외곽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를 잘 안다. 11장 1절에서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에 사는 나사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5절에선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라고 약간 정정 보충하고 있다. 11장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사건의 기록이고 이 사건의 파장으로 예루살렘에서는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여 없애 그의 기적을 무산시키려 했다. 이 부활 사건 다음에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마르다와 그의 형제’라는 표현은 ‘마리아와 그의 형제’라는 식으로 순서가 바뀐다. 그것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이 예수의 생애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곧 왕의 결혼, 혹은 왕과의 혼례라는 요한복음 전체 주제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결혼은 어떤 결혼인가?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는 결혼의식이다. 죽음과 장례로써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혼례의식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복음 14:9)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을 우리는 누가복음 7장에서 이미 보았다. 누가는 그녀를 죄에 몸을 바친 한 여자라고 했다. 그때는 예수의 사역초기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나온다. 두 저자는 동일하게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 조금 더 세부적인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누가는 시몬이 문둥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문둥이라고 밝힌다. 시몬은 바리새인이면서 문둥병자였다.

 

요한복음이 향유 사건의 주인공이 마리아였다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과 달리 마태와 마가는 ‘한 여자’라고 씀으로써 누가처럼 그녀를 감추었다. 왜 그랬을까? 사복음서의 저술 순서와 시간을 계산해 볼 때 마가 마태 누가는 마리아를 어떤 방식으로든 숨겨주었고 요한은 밝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요한복음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 기록의 뉘앙스는 무엇일까? 요한은 먼저 기록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교회에 회람되며 읽혀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밝히지 못한 사실에 대한 밝힘의 선언과도 같이 읽힌다. 일종의 ‘이젠 말할 수 있다’다. 왜 이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리해 볼 수 있다. 마태 마가 누가는 마리아가 누구인지를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하고 사려 깊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의로 누가는 시간상의 순서를 바꾸었고 마태와 마가는 이름을 감추었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그런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밝히 알려 주려 하고 있다. 과연 마르다와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 보다 먼저 나사로에 대해 살펴보자.

 

나사로를 찾아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요한복음 11:5).

 

이 진술은 예수의 마르다 일가와의 관계가 상당기간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언제나 베다니를 들렀다. 마르다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에는 마르다와 그녀의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가 있었다. 같은 동네엔 바리새인이자 문둥병자인 시몬도 살았다. 그는 죄에 몸을 바친 여자로 창녀였던 마리아를 불결히 여겼다. 그녀가 자기 동네에서 몸을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바 예루살렘과 베다니는 불과 3Km 거리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녀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예언자라 불리는 예수 앞에 세워졌던 일이 있었다. 예수는 그녀를 정죄하기보다 그녀를 정죄하는 데 가담하고 있는 모든 자들의 율법(해석)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심으로써 그녀를 구출해 주었다.

 

누가는 그녀가 예수께 향유를 부어 죄 사함의 선포를 받았다고 했다. 나머지 복음서는 그녀가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의 장례를 기념했다고 썼다. 예수와 마리아는 그 두 가지를 주고받았다. 아무튼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예수를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마리아였을 공산이 크다. 마르다는 자기 동생을 구해준 예수를 집으로 초대한다. 예수는 그녀들과 동생 나사로를 알게 됐고 늘 그들에게 가서 머물렀다. 여기서 나사로는 일반적으로 이 가정의 가장으로 인식됨에도 그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나사로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남동생이었을 가능성은 이미 언급했다. 그 외에 나사로가 남동생은 아닐지라도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복음서의 기록이 있을 법 하다. 어디일까?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누가복음 16:19-21).

 

이 비유의 결론은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에 드러나 있다. 즉 율법과 선지자를 지식으로 자기의 사회적 계급과 위상과 경제적 이익을 공고히 하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계급들, 유대의 귀족들을 향해, 그들의 신앙의 실제적 비양심과 거짓됨을 드러내신 것이다. 너희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그것이 무엇인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하는 부자들이 있는데,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들의 대문에 누워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하는 거지가 있다. 그런 거지와 같은 생존현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그것에 상관치 않는 부자들을 위한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의 율법에 대한 헌신과 충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거지의 이름이 예사롭지가 않다. ‘나사로!’ 그는 예수 자신과 매우 친절하고 예수가 마치 남들에게 보이기라도 하듯 그 집에 가서 머물곤 하는 외로운 가정,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마르다와 몸을 팔며 자신을 세파에 내팽개쳐 버렸던 마리아의 집의 남동생의 이름이다. 예수는 왜 하필 헌데를 앓으며(피부병?)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기대하고 문간을 서성거리는 거지를 나사로라고 이름 붙였을까? 이것은 지어낸 비유인가, 실제 존재한 현실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 나사로가 실재하는 나사로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나사로는 악성 피부병 내지는 문둥병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 마르다의 집 뿐 아니라 조금 더 살만한 바리새인이자 문둥병자인 시몬의 집에도 머물렀고, 마르다가 자유롭게 그 집을 드나들며 일 할 수 있었다는 데서 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마리아는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의외의 취급을 받았다.) 혹은 베다니에는 이러한 문둥병자와 그 가족들이 극히 가난한 자들과 모여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러한 베다니라는 촌락,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에 관례적으로 머물렀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고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본래 만성적인 영양부족과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걸을 했을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집의 처녀들과 친밀한 사이였다! 이 모티브는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써먹었다. (거기서 예수는(여기서도 엉뚱하게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혼인한다. 󰡔다빈치코드󰡕도 같은 맥락의 변형된 이야기다.) 이러한 문학적 상상력은 복음서에 관한 의도적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주제적 혼돈일 뿐이다. 다만 복음서(특히 요한복음)가 예수를(인간 영혼의) 영원한 신랑(남편)으로, 종교를 죽음과 혼례가 결합하는 신비로운 의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만은 어렴풋이나마 인식했다고 보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나사로의 장례에 청한다. 어떤 의미인가? 예수는 마치 그 집안과 장례를 대표할 정식적인 남자로서 부름을 받는다.(어떤 의미로는 예수님 자신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려 죽은 후에 감으로써 그렇게 만든다.)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이 상가(喪家)에 당도하자 그런 의미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청원을 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한복음 11:21,2).

 

이 말의 뉘앙스는 기묘하다. 그녀는 동생이 살아날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면 그녀가 바라는 것, 예수가 바라는 것, 하나님이 주실 것, 그녀가 아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여기까지만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짐짓 그녀의 갈망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의외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 표면적으로 마르다의 신앙 깊은 말들이 이어지지만 예수와 마르다의 문답은 겉도는 것이었다. 그 다음 아무런 설명 없이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절).

 

마르다의 말은 ‘선생님이(내가 아니라) 너를 부르신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러나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같은 식의 말을 주고받게 된다. 예수는 마르다 집안을 대표하는 장례의 상주를 거절하셨다. 그 대신 나사로를 즉각적으로 부활시킴으로써 진정한 주인(주님, 가장, 신랑)으로서 자신의 대답을 하셨다. 마리아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의 복음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고 마지막 예수의 유월절 예루살렘행 직전에 그에게 향유를 부음으로써 혼례와 장례의 의미를 동시에 담은 자신만의 이별의 의식을 거행한다.

 

이 같은 배경을 이해하고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전통적이고 협소한 메시지를 뛰어넘는 복음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 38-42).


<By Jan Brueghel the Younger - National Gallery of Ireland, Wikipedia Commons>


 

전통적으로 이 에피소드는 분주한 봉사보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인용됐다. 그러나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이 가정과 예수에 얽힌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의 차이, 생각의 차이, 예수의 반응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특히 이 에피소드의 메시지가 여성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여성의 현실이라는 문제들에 대한 특별한 도전으로 깊이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시대를 초월하여 이 같은 여성 문제에 가장 극심하게 노출된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은 아마도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예수 앞에 돌로 맞아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예수께서 그녀를 구출해주신 사건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 사이 예수님과 마리아 집은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됐을 것이다. 마르다는 너무나 고마운 예언자 예수님께 어떡하든 사은의 표시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자기 집으로 그분을 초대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예수의 기본적인 동행 뿐 아니라 인근 거류민들까지 몰려들었다. 과거였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그들(동네 사람들)을 할 수 있는 한 풍성하게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바빠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마리아는 모르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에겐 언니가 생각하는 동네 사람들에 대한 대접, 자기들의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만회, 예수님에 대한 합당한 예절, 그동안의 형편없었던 자긍심을 회복시키고 싶은 간절한 야망, 같은 것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흥, 누가 뭐라던, 어떻게 생각하든 난 아무 상관없어. 지금 나는 예수님 곁에 이렇게 앉아있다니까. 이게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니까. 다른 누구의 눈치도 인정도 필요 없다고.’하는 태도는 아니었을까? 혹은 자기야말로 예수님을 이 집에 초대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자긍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긍심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예수의 곁에 딱 붙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당연한 사실이지만 고대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식사 자리에 함께 앉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이 예수의 복음운동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언니 마르다는 동생이 야속했다. 어쩌면 꼴 사나왔을 것이다. ‘저 철없는 것, 지금 지가 저러고 앉아있을 때야? 지가 누구야? 우리가 어떻게 살았어? 자기와 우리 집에 대한 온 동네의 평가를 만회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저렇게 경솔하고 뻔뻔하게 행동해서 망치고 있다니. 철딱서니 없는 것.’ 동생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마르다(마르다는 ‘숙녀’ 마리아는 ‘높다, 존귀하다’는 뜻)는 이런 저런 스트레스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드디어 예수께 가서 넌지시 이른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고소인의 원망과 간청이 담긴, 그러나 예수를 향한 예절과 자기를 향한 애정을 갈구하는 표정이 담겼을 말 같다. 이런 말은 크게 떠드는 게 아니다. 아마 마르다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비스듬히 누워 담소하며 식사중인 예수께 가까이 가서 재빨리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대답이 책망의 톤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두 번 마르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능히 짐작할만하다. 그녀의 분주함과 걱정에 대한 사랑과 친근함과 안타까움이 담긴 표현임이 분명하다. 그 말씀의 일차적 의미는 음식에 관한 것이다.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 이차적 의미는 영생에 관한 것이라 들었을 것이다. 맞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하면 교훈과 설교만 남고 문답을 주고받던 당사자들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실종된다. 이차적 의미는 동생(마리아)에 관한 것이다. 그녀를 내버려 두어라. 네가 근심하고 있는 것, 염두에 두고 있는 것, 마땅히 그렇게 했으면 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네 동생은 그런 것들로부터 떠났다.

 

그녀는 자유로워졌고 해방 되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그 한 가지를 이미 붙들었다.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해주는 단 한 가지. 우리가 그것에 기대어 살아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 그것을 마리아는 붙들었다. 그러니 네가 빼앗으려해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빼앗으려는 모든 시도 그것이 더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다!(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네 동생은 이미 자유로워졌는데 너는 이제 또 다시 동생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냐? 동생을 과거에 얽매인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려느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다. 마르다는 봉사와 헌신으로 마리아는 자유로워진 영혼으로 그의 곁에 함께함으로써 사랑을 나타낸다. 어떤 사랑이 이 세상에 더 근본적이고 절실하게 요구되는가? 특히 강요된 마르다식 사랑법으로 마리아의 자유를, 그녀의 사랑법을 강제하려는 시도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와 해방을 무위로 돌려버릴 수가 있다. 그리스도가 해방시킨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틀에 가두어 버릴 위험이 있다. 세상이 항용 그런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아닌 소유로, Being이 아닌 Doing으로. 그러나 그 소유와 행동은 신적 사랑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언제나 타인을 의식하는 기제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마르다는 그것이 감사해서 예수를 초청했으면서도 어느새 그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그런 것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되돌아가버리는 수가 얼마나 많은가!

 

명절을 맞아 분주하게 보냈을 것이다. 여성들은 특히 명절을 준비하고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많은 근심과 마련과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분주한가? 명절이란 무엇인가? 음식의 문제라면 몇 가지만이나 혹은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유로워졌는가? 스스로를 또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가? 스스로의 또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가? 우리에게 자유를 가능케 하는 그 한 가지(진리)를 붙들고 있는가일 것이다. 명절 증후군이니 명절 이혼이니 하는 말들이 들린다. 특히 여자들을 얽어매는 무수한 부자유와 스트레스들이 명절을 기화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 페미니즘도 좋고 남녀평등도 좋고 다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복음에 들어있는 한 인간을 향한 완전한 해방의 진리와 그것을 초연하고 일관되게 표현하는 예수의 감동적인 사랑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신다.(그녀들이 예수를 자기들의 신랑감으로 상상할 정도로!) 그런데 이런 예수를 우리는 우리의 신랑으로 삼고 있다. 신랑이라는 표현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남성 중심주의라 불편할진 모르겠지만, 아니다. 이런 예수를 진정한 신랑으로 삼고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여성들의 분주함과 스트레스를 요구하는 남성지배의 세상에 대한 저항이고 해방의 의미가 아닐까. 아무려나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부디 다음 명절부터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한가롭고 조용한 사색과 명상의 축제가 되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의 손을 잡고 진실의 눈을 마주치며 함께 앉아보는 기념적인 날이 되기를 바란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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