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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돈, 섹스, 권력’ - 말씀의 타락

by 한종호 2015. 1. 23.

한종호의 '전병욱 그 병폐의 프리즘'(2)

, 섹스, 권력’ - 말씀의 타락

 

한때 청년들에게 존경하고 따르는 목사의 아이콘이었다가, 성문제로 파문을 일으켰던 전병욱 목사가 다시 교회 개척에 나선지 3년이 흐르고 있다. 현재 그가 속한 합동측 평양노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목사직 면직 문제는 일반 법정에 고소 고발까지 가는 사태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가 이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자숙하기보다는 사건 자체가 일어나 본 적도 없는 듯이 여기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원래 시무하던 삼일교회에서 물러날 때 상당한 액수(10억대)의 전별금을 챙겨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전병욱 목사는 그의 설교 메시지가 담고 있는 문제를 넘어서서 한국교회의 성과 권력, 그리고 돈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보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실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안은 단지 윤리적 논란거리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 몰두하거나 빠져 있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전병욱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전병욱 개인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주류 권력의 문제해결에 접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전병욱 목사가 그동안 청년들에게 강조해왔던 성공주의의 정체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그것은 전병욱 목사가 어떻게든 한국사회의 권력 내지 주류의 중심에 진입하는 것을 성공으로 이해해왔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가 성 중독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전 목사의 성취주의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게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성찰보다는 맹목적 성취주의에 빠져들게 하고, 그에 인한 여러 가지 긴장과 심리적 압박을 성 도착이라는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모습을 그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다고 하겠다.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신이 성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보다 근원적 성찰을 통해 삶의 전환을 가져오려 했거나 또는 목회를 그만두는 방식으로 그 책임을 지는 선택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대해 한국교회가 도리어 침묵하거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는 것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결단과 자세 변화의 기초 위에 전병욱 목사의 삶이 전개되기 보다는 그와는 반대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 삼거나 논란을 벌이지 않고 있는 것은 교계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한국교회에 보내고 있는 경멸의 눈길에 대해서도 윤리적 민감성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는 상태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 교계는 이미 너무 많이 이런 사안에 접해 있다보니 전병욱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자기 구린 데가 있어어쩌지 못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일단 그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결론짓기 이전에 그가 새로 개척한 교회에서 했다는 설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병욱 목사와 관련해서 할 말은 많지만, 그의 성추행 논란 이전에 그가 하는 설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인가? 그가 목회하는 교회에는 여전히 청년세대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 목사는 어떤 메시지를 통해 소위 은혜를 받게하고 있을까?

우선, <선명한 기준과 거침없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출애굽기 121-14절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이 설교는 지난 20127월에 전병욱 사건을 통해 보는 한국교회 토론회에서 발제하기도 했다). 골자는 기독교인들이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면서 거침없는 용기를 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유월절 본문으로 당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곧바로 애굽을 떠난 사건을 중심에 놓았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곳곳에 얼토당토하지 않은 해석과 주장이 남발되고 있어 이게 과연 설교이긴 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이런 메시지를 어떻게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런 식이다. 히브리인들이 유월절 식량을 먹고 즉각 그 땅을 떠나라는 대목에 대한 예화는 다음과 같다. 그는 급히 먹고 움직이라는, 즉각적인 순종을 이런 보기로 교인들에게 해설하고 있다.

옛날에 제가 일본 전산 이야기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전산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여기는 교토에 있는 회사입니다. 동경같이 수도가 아니기 때문에 인재들이 잘 올 수 없죠. 여기는 독특하게 인재를 뽑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래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 오래 달리기를 잘 하면 투지력이 있다고 뽑고. 제일 인상적이었던 게 뭐냐. 밥 빨리 먹는 사람을 뽑았어요. 실제로 보니까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도 밥 빨리 먹는 사람이 회사 일을 훨씬 더 잘 하더라는 거예요.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저도 사람을 겪어보니까 뭔가 일을 의욕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밥을 빨리 먹어요. 어느 분야에서 성공이 단지 좋은 건 아니겠지만, 부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보면 밥을 느리게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밥을 느리게 먹는 사람들의 특징은 건강해요. 건강한데, 회사가 망하죠.”

밥을 급히 먹도록 촉구하는 것은 야만이다. 유월절의 상황은 탈출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걸 유월절과 동일한 기준에 놓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게다가 사람의 건강과 회사의 흥망을 서로 연결해서 건강한데, 회사가 망하죠라고 하면 회사가 흥하기 위해 건강을 해쳐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그 다음은 이렇게 논리를 펴고 있다.

이 이야기와 딱 맞는 건 아니겠지만, 급하게 먹으라는 얘기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유목민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더는 옛 삶에 미련을 갖지 말고 대탈출을 향한 고도의 긴장감을 예비하게 하시는 말씀이 급하게 먹으라는 식으로 저열하게 해석되고 있다. 말씀의 타락도 이런 지경이 있을까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말라는 논리가 또 이렇게 토로된다.

민심에 대해 너무 예민한 건. 그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민심이 천심이다는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그런 말처럼 웃기는 말이 없어요. 민심에도 죄성이 녹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민심이 뭐예요. 사람들에게서 모여진 의견 아니예요? 사람들이 죄인이잖아요. 민심 속에도 죄가 녹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민심이라는 이름의 여론이 가지고 있는 허구와 오류는 분명 있다. 그러나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민심의 절대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사람들을 짓밟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상황에서 나온 경고이다. 권력자 자신의 자의(恣意)가 민심을 억압하고 역행해나갈 때, 세상은 고통스럽게 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이다. 권력자들이 방자해지고 오만에 차서 군림하기만 하려 할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한에 찬 아우성 속에서 역사하시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내 백성들의 울부짓는 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모세의 파견이었다.

이런 식으로 민심의 의미를 폄하하고 뭉개면서 자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막아보려는 것 아닐까 하는 혐의가 엿보이는 대목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전 목사가 도달하는 것은 순종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명확하게 선을 그어 주는 것이예요. 하나님 말씀의 선을 그어 주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순종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데 왜 순종이 안 되느냐.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순종이 힘든 거예요. 명확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있으면 순종이 쉽습니다.”

유월절을 다룬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들이 무참하게 억압받고 살면서도 구각(舊脚)을 벗지 못한 채 노예적 의식과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 그 핵심이다. 따라서 여기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거대한 저항과 삶의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순종하는 자를 만들어 자신의 말에 복종하도록 하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예화도 자신을 노예화시키는 물신에 대한 거부와 전혀 다른 삶의 선택이 아니다. 그는 뭐라고 했을까?

제 주변에 사람들 중 한 형제가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예요. 젊은 남자들이 참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앉아가지고 자동차를 얘기하고, 자동차에 대한 꿈을 꾸고. 저는 그런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자동차를 별로 안 좋아해요. 자전거를 좋아하죠. 그 형제 입장에 한 번 들어가 봤어요. 그 형제가 원하는 자동차가 좋은 차예요. 벤츠 E클래스를 갖고 싶대요. 우리 교회 어떤 김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차를 타고 다녀요. 그것을 탐내고 있어요. 그 형제는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가 저 차를 타면 얼마나 좋을까. 저 차를 타고 다니면 얼마나 멋있어 보일까.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겠죠.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대요. 홍대 클럽 같은 데 가면요. 젊은 여자들이 좋은 차 타고 오는 남자들을 그렇게 좋아한대요. 테이블에 앉으면 차 키를 올려 놓는대요. 그런 걸 상상할 거 아니예요.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가 싫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차가 불편해지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다른 것에 대한 꿈을 꾸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예요. 그 젊은이 입장에서 한 번 상상을 해 보는 거라고. 어떤 것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고, 기대감이 생기면 나중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모습들이 불편해져요.”

어떻게 예를 들어도 이런 식일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면서 벤츠에 마음을 빼앗겨 지금의 자신의 차와 처지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을 보기로 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유월절의 메시지는 그런 욕망과 결별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향해 가는 거대한 여정인데 그 위대한 메시지를 이렇게 졸렬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결론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교회가 유월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말씀 때문에 불편한 인생이 됩시다. 절대 평탄하지 않는, 그들에게 가장 큰 보험의 1순위가 됩시다. 보험이라는 것이 헬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온다. 우리가 그런 작은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믿음의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

믿음이 뭔가 계속 보험료를 내면 언젠가 타 쓸 수 있는 보험인가? 악한 권세와 마주해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는 인생에 대한 보험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의 가치를 달리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용어로 말씀을 해석하고 그걸 메시지화 하고 있는 전병욱 목사와 홍대새교회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들은 출애굽기의 말씀대로 그 욕망의 땅을 속히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정한 해방의 길에 눈뜰 수 있을까.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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