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3)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1)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3)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거짓 예언’과 ‘거짓 예언자’는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이 야훼의 참 예언자는 아닙니다. 그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섞여있는데 그들에게 ‘거짓 예언자’라는 명찰이 붙어있지 않아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는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예컨대 신명기 18장은 야훼께서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야훼의 이름으로 제 맘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고 말합니다(20절). 또 “예언자가 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니 너희는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22절)고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이 성취되면 참 예언자이고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란 얘기입니다.

 

예레미야 23장에 나오는 구별법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생각이나 환상을 야훼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6절). 사람들이 야훼의 말씀을 멸시하는데도 만사형통하리라고 말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데도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자도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7절). 야훼께서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 나가 야훼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도 역시 가짜 예언자랍니다(21절).

 

모두 그럴듯한 기준이지만 충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취된 예언이 참 예언이란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거짓 예언이란 말은 수긍하기 힘듭니다.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느냐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까지는 참 예언인지 거짓 예언인지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 재림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성취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을 한 예수는 참 예언자일까요, 거짓 예언자일까요? 아직 진위(眞僞)가 판명되지 않았으니 판단을 유보해야 할까요?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지 자기 생각을 말하는지, 야훼에게 보냄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달려 나왔는지는 예언자 자신 외에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성서가 제시하는 판별법만 갖고는 예언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학자들이 성서에서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객관적인 기준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린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점은 가끔은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대 왕 여호사밧이 라못 길르앗을 탈환하기 위해 힘을 합쳐 시리아와 전쟁하려 했을 때 미가야 예언자는 환상을 봤습니다. 야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의 예언자들에게 보내서 그를 꼬드겨 전쟁터에 나가게 해서 죽이려 한다는 환상 말입니다(열왕기상 22:19-22). 여기서 야훼는 아합을 ‘거짓말’로 속여 전쟁터로 불러내 죽게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 야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4:11). 야훼가 예루살렘에 약속한 안전은 거짓이란 얘기입니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속이셨다는 뜻이죠.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탄식조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야훼님, 야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야훼께 속았습니다. 야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야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20:7-8). 예레미야가 야훼께 속아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외쳤는데 바로 그 때문에 자기가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예레미야의 말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자신이 선포한 심판이 실현되지 않아서 자신이 백성에게 조롱당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하소연입니다. 심판을 선포했지만 예언자 자신도 그게 언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그게 지체되는 통에 그는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그런 맥락에서 자기가 야훼에게 속았다고 하소연한 겁니다. 물론 야훼가 예루살렘의 안전을 약속했다가 그게 뒤집혔으니 백성들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냐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예언의 관계적 성격을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야훼의 심판은 백성들의 응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언자가 야훼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해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야훼는 이미 선언된 심판도 취소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는 거짓말

 

성서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걸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은 엄연히 존재하고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성서가 제공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참과 거짓이 뚜렷이 구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게 관건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예언자들은 대부분 야훼의 보냄을 받은 참 예언자들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요엘, 미가, 호세아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라고 판명된 예언자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대립했던 하나니야와 미가야와 맞섰던 시드기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참 예언자들이 실제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그렇게 인정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 대접을 못 받은 사람도 있었고 원수 취급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죽임당한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가나 아모스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본다면 놀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박해했던 자들이 참 예언자로 존경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둘을 구별하는 왕도(王道)나 비방(秘方)은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 할 때마다 인용된 신명기와 예레미야 구절들과 그 외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판단이 옳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영혼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받아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메가처치’가 온갖 문제의 온상입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말하면 메가처치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쾌하지 만들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뒤집으면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신랄하게 말하면 교인들에게 아첨하는 말만 합니다.

 

 

꾸중이나 질책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도 꾸중 듣길 싫어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들어야 하는 꾸중이라면, 네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질책이고 내 영혼의 병든 구석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꾸중이라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 꾸중과 질책은 들을 땐 고통스럽지만 결국에는 영혼이 치유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여기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이런 꾸중과 질책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고통스런 질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꾸중 듣길 싫어하긴 하지만 지루해서 졸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대교회의 특징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사회악’은 말하지만 ‘개인의 죄’는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 말고 누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는 말입니까? 사회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편 메가처치나 그게 되고 싶어 하는 교회는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강조하는 교회는 전통적인 보수교회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는 죄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질책하는 데 그칩니다. 교회는 사회악도 얘기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죄와 사회 전체가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합니다. 듣기 싫어한다고 침묵해서는 안 되고 개인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듯 덮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진보교회와 메가처치, 보수교회 모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 것과 실제로 죄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은 다릅니다. 죄로 물든 영혼의 심각성과 그것이 개인의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타락시키는 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끈질기게 파헤치지 않고 그저 건성으로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는 교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죄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진지하게 얘기하지는 않는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세상도 널 대할 것이다

 

 

참된 우정은 친구를 잃어버릴까봐 친구의 잘못을 모른 채하거나 참는 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애인을 잃어버릴까봐 그의 병든 영혼에 진통제만 놓는 게 아닙니다. 교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려는 교회라면 거짓말로 교인과 세상을 마취하려 하지 말고 잘못된 길로 가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꾸중과 질책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엔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하겠지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뒤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인생의 비밀은 단 한 가지,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것이다…. 네가 세상을 향해 웃으면 세상은 더욱 활짝 웃을 것이요 네가 찡그리면 세상은 더욱 찌푸릴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진실하게 대하면 세상도 교회를 진실하게 대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거짓으로 대하면 세상도 그럴 겁니다. 세상이 웃는다고 따라서 웃는 데 그치지 말고 세상보다 먼저 웃으면 어떨까요? 세상이 찡그린다고 따라서 찡그리지 말고 먼저 웃어줌으로써 세상에 웃음을 찾아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에서 조피아와 엘즈비에타의 종교가 바뀌었습니다. 가톨릭 교인이었던 조피아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고 유대인 소녀였던 엘즈비에타는(그리스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경건하게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둘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지 여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에 얼마나 진지한가,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가가 중요하겠지요.

 

조피아는 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했지요. 어렸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모르지만 자라면서 분명하게 그 차이를 깨닫는다고도 했습니다.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사람은 그 신을 거부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신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외로움(loneliness)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 달게 받아야 할 벌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조피아가 얘기한 유대인 아이를 미끼로 저항 운동가를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진실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영화는 이에 대해 묘하게 침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지만 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엘즈비에타는 그 얘기로 인해 사십 년 동안 꿔온 악몽에서 해방됐습니다. 조피아도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사십 년 동안 괴로워했는데 마침내 만나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진실한 말 한마디가 두 사람 모두를 악몽에서 해방시켜 준 셈입니다.

 

말은 사랑을 담아 건넬 때 진실해지고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진실은 사실의 확인 이상입니다. 진실한 말에는 애정이 담겨 있기에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두 여인은 만나기 전엔 각자 자기 안에 똬리 틀고 앉아 괴롭히는 악마와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두 사람이 애정이 담긴 진실한 말을 나눴을 때 증오와 죄책감이란 악마에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을 없애려면 참된 말로써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한 마디 말에 진실을 담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 말로 깨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사랑이 담긴 한 마디의 말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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