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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유철의 '음악정담'

나만의 명품

by 한종호 2015. 1. 22.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4)

나만의 명품

 

제 서재에 있는 책이나 음반의 대다수는 좋게 말하면 삼류,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입니다. 가방끈이 짧고 책이나 음악에 관한 좋은 친구나 선생을 만난 적이 없던 제게 시행착오는 불가피했습니다. 가장 책을 바지런하게 읽던 80-90년대에도 신문에 신간 소개란이 있었고, <출판저널>이란 격주간지도 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살면서도 큰맘을 먹어야 광화문이나 종로의 대형 서점엘 갔을 뿐, 보통의 경우는 동네 서점을 단골로 드나들었습니다. 살던 곳이 숭실대 근처였고, 출근하던 교회 근처에 인문, 사회 과학 서적을 많이 갖춘 서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책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북 콘서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을 통해 궁금한 책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도 없었습니다.

음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0년대 후반의 수입 자유화 이전에 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창 음반을 모아야 할 시기에 저는 지금처럼 각 나라의 음반을 구색 맞춰 구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나 동구권의 음반은 수입이 금지되었던 터라 쇼스타코비치나 동독 연주자들의 경우 음반은커녕 연주자 이름도 잘 몰랐습니다. 어디에 가야 내가 구하고 싶어 하는 음반을 살 수 있는지 노하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는 음반점에 찾는 음반이 없으면 쉽게 포기하곤 했지요. 지금처럼 해외 옥션이나 아마존에서 음반을 구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지 않아도 될 책이나 음반 구입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긁어모은 책이나 음반 중에 소장 가치가 있는 소위 명저나 명반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40대까지는 그런 명반이나 명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은근히 위로를 받거나, 그런 책이나 음반을 알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였거든요. 명저나 명반을 알고 소유한 것으로 실력이 입증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제가 소장한 일류에 속하는 대다수 책이나 음반들은 근사하게 보이고 싶다는 허영에 제가 얼마나 자주 굴복했는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들일 뿐입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을 그때 어떻게 소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기는 했지만 피와 살이 될 정도로 깊이 읽거나 들어서 체화시킨 책이나 음반은 매우 적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게 있는 책이나 음반들은 일류냐 삼류이냐를 따질 것도 없이 주인이 삼류란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제게 바흐는 <마태 수난곡>의 작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0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국립합창단의 <마태 수난곡> 공연을 통해 바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와 소나타>,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수많은 그의 종교 칸타타와 수난곡 등을 좋아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의 칸타타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을 지휘해 보았지만 제게 언제나 최고의 바흐 음악은 <마태수난곡>이었습니다. 처음 소장했던 관넨바인 지휘의 LP 음반은 아직도 그 재킷이 선명합니다. 총신대 정훈택 교수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선물했던 <마태수난곡> 전곡은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나면서 <마태수난곡> 음반이나 영상물은 20개가 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마태수난곡> 새 음반이 나오면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듯 기웃거리게 됩니다. 지난해에도 영상물만 세 개를 구입했습니다.

이반 피셔가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마태 수난곡>2012330일과 41일 암스테르담의 콘체르트허바우에서 있었던 공연실황입니다. 현존 최고의 복음사가로 손꼽히는 마크 패드모어와 피터 하비가 맡은 예수, 그리고 네덜란드 방송 합창단이 참여한 연주입니다. 객관적으로 이 연주가 최고라고 꼽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정신 건강을 위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평가는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이반 피셔는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는 지휘자 가운데서도 톱클래스라 말하기가 주저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마태 수난곡>의 음반 역사 속에서 이반 피셔의 존재는 미미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반 피셔는 바로크 음악, 그것도 바흐 전문 연주자는 아닙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바흐의 <마태 수난곡> 연주사에 길이 남을 연주를 남길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늘로부터 거룩한 영감을 받았더라도 말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이반 피셔의 템포가 옛날 선배들의 연주를 떠올릴 만큼 느긋하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누가 더 빨리 연주하느냐를 시합하듯 연주하기 때문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거든요.

 

1등 또는 세계 최고란 기준으로 보자면 이반 피셔의 <마태 수난곡>을 위해 4-5만 원 상당의 블루레이를 구입하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반 피셔는 물론 이 연주에 출연하는 모든 연주자들이 동시대인이고, 저들 나름의 삶과 음악이 있어서 저들만의 메시지나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이런 연주도 달리 들립니다. 저들 개인의 개별성과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 연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빚이 바라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는 얘깁니다.

저는 세상을 떠받치는 진정한 힘을 1등이나 세계 최고가 만들어 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는 사랑이나 사람이나 물건들은 1등과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것들임에도 그것들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내일을 꿈꾸게 하고,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바로 그런 소소한 기쁨이고 위로가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일류가 아닌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호들갑을 떨 일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서 제 서재에 있는 삼류 음반이나 책이 일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삼류 음반이나 책으로도 세상은 살 만하고, 그것들이 언제나 삼류 기쁨이나 삼류 의미만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나만의 명품 음반이나 명저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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