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 배운다(?)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 11. 2. 17:27

한종호의 너른마당

 

욕하면서 배운다(?)

 

 

나사렛 예수께서 선교사역을 다니신 시기는 로마 제국의 지배와 헤롯의 통치로 이스라엘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무수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이런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다 때려 부수자’ 하는 봉기의 선동이다. 나사렛 예수는 실로 이 봉기의 슬로건을 내세워 선교하셨다. 그러나 그 차원이 다른 저항운동과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 보자면, 복종과 현실 수긍의 논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는 발언들을 예수는 하셨던 것이다.

 

한이 맺힌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꿈꾸도록 되었을 때 그들의 현실을 보는 눈은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깊은 불만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세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있고, 부패한 자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으며, 무능력한 자들이 높은 지위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왕과 귀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이들에게 의분을 끓게 하는 일이었고, 세례 요한의 불 같은 함성은 이들의 잠자고 있던 의식을 일깨웠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의분의 불길을 하나로 모아 기존체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방도 외에는 썩어빠지고 부정의한 세상을 구할 길이 없어 보인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바로 이 일을, 이 거사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점에 모아져 있었다. 하여 이들 이스라엘 민중들을 모아놓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발언은 “이제 때가 왔다. 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모두 끌어내서 본때를 보여주고, 우리들 세상을 만듭시다. 자, 나를 따르라”고 해야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 시대를 구원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는데,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로 열기가 가득한데도 그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집결시키거나 결속하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이들의 전의를 약화시킬 만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식의 말이었다. 그 동안 우리를 인간처럼 보지 않은 저 나쁜 놈들을 이제 처단할 기회가 오고 있는 것만 같은데 원수를 사랑하라니? 그러면 저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이야기인가?

 

 

 

이런 의구심이 일어날 법한데도 예수는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이런 발언을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누가복음 6:37).

 

이것은 그의 인기를 위해서나, 이스라엘의 혁명을 위해서나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될수록 독하게 마음을 먹고, 사사로운 정은 접어두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만큼 일벌백계의 마음으로 처단할 자는 과감히 처단하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새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사렛 예수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들에게 다가간다. 이렇게 힘들고 억울하고 봉기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끝끝내 그 미움을 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대목은 단순히 기독교 윤리의 개인적 품성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도저히 품기가 어려운 갈등이 첨예한 현실에서 요구되고 있는 덕목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의 깊은 차원에 눈을 뜨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냥 만사가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편안하면 남을 심판할 이유도 없고, 정죄할 마음이 일어날 이유도 없으며, 남을 굳이 용서하지 못할 바가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악한 일을 당하고 자기 가족이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인간은 이성을 잃어버린다. 또 그런 경우에 어쩌다가 집단의 힘까지 얻게 되면 그는 잔인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의로운 분노’로 충분히 위장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수 있다.

 

악한 일을 당하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악한 일을 당하면서 치르게 되는 고통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그 당사자가 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지만, 대단한 민주투사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고된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그 시어머니보다 더 독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희귀한 것이 아니다. 실로 이런저런 일로 고되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음이 관대하고 어려운 사람의 입장을 잘 알고 도와줄 듯하지만, 자신을 고난에 빠뜨리고 어려운 때에 누구 하나 자기를 제대로 도와준 자가 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또 이렇게 독한 사람이 없을 듯하게 무정하고 냉혹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열망을 알지 못하실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성취되기를 기원하신다. 이들이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인간적 존엄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정의로운 미래가 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고된 삶으로 해서 이들의 마음이 악해지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며, 기회가 왔을 때 정죄와 처벌의 권리를 함부로 휘두르는 자가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현실이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사에 전개되었던 무수한 혁명과 개혁조처가 대체로 실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판과 정죄와 용서하지 못함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반드시 ‘반동의 시대’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인간을 파괴시키고 만다.

 

하여, 하나님의 의를 마음에 품고 인간과 현실의 변화를 원하고 꿈꾸며 실천하는 경우일지라도, 자신을 심판자, 정죄자, 용서의 권리를 가진 자의 위치에 놓는 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거스르는 일이 된다. 악한 일을 당하면서 저도 모르게 같이 악해지고 거칠어져 가는 인간들에게 나사렛 예수는 그런 중에도 저들 악한 자들을 닮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세워나가는 미래는 인간을 상처내고 파괴시켜 나갈 뿐이다. 현실이 아무리 거칠고 독이 오르게 해도 ‘저들을 닮아서는 아니 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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