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음식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33)

 

종교와 음식

 

 

요즘 미디어에는 요리와 음식관련 프로그램이 차고 넘친다. 한식, 양식, 중식, 패스트푸드 등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전국을 넘어 전 세계의 맛집이란 맛집은 모두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요리 관련 이야기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조리하는 이들도 언제부터인가 쉐프란 고상한 외래어로 수식되며 오래 수련 끝에 획득한 현란한 손기술을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시전하며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감탄사를 즐기고 있다. 뭐 특별한 일도 아니다.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사람들은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왕이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식당에서 행복한 서비스를 받고 싶은 것이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음식과 요리에 대한 관심은 세속의 문제만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음식과 요리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많은 종교들이 전통과 의례 속에 먹음의 행위를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의 먹음 행위는 단순 배를 채우는 것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영성적 의미를 부여하며 음식과 요리를 더욱 풍성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잠시 대표적인 종교들의 음식이란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선 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성만찬 역시 이 먹음의 행위를 종교의례로 보존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떡과 포도주가 참으로 신의 몸이 된 것인지, 아니면 구속사적 행위를 기념하는 의식으로 성찬의례를 보건 간에 음식을 취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먹음의 연장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탁발 위주인 남방 불교권이든, 고유한 사찰음식을 개발한 북방 불교권이든 아침의 공복을 깨는 공양의식은 엄숙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탁발, 즉 구걸을 통해 끼니를 해결했던 남방 불교와는 다리 한국, 중국, 일본, 티벳 등의 북방 불교는 스스로 음식을 조리해 먹는 전통을 일궈냈다. 이때 북방 불교권의 사찰음식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선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소 중에서 오신채라 불리는 ,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재료들이 지닌 강한 냄새도 이를 금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 사찰음식은 약의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해 다양한 약리작용을 갖고 있고, 네 번째 천연 조미료를 사용하여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내었고, 마지막으로 제철 음식 위주로 요리를 하게 된다.

 

이슬람 역시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무슬림의 식사는 종교생활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식사행위는 그들의 경전과 종교전통을 철저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종교적 수순에 의해 도축된 육류만 섭취한다. 흔히 이를 할랄’(halal)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허용된 것이란 뜻이다. 이른 바 할랄푸드는 알라의 이름으로 도살된 육축의 고기를 말한다. 고기를 얻기 위해 무슬림들은 우선 동물에게 물을 먹인 뒤 메카 방향으로 자세를 잡게 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시다!”를 낭송한다. 그리고 반드시 동물의 목 뒤 동맥이나 식도, 혹은 호흡기관 부위를 베어 도축한다. 이 과정을 거친 고기만이 무슬림의 식탁에 오를 수 있다.

 

무슬림들의 종교적 식사행위는 라마단이라 불리는 금식기간에도 도드라진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9번째 달로 이슬람 전통에서 매우 성스럽게 여기는 기간이기도 하다. 1년 중 알라에게 더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해가 뜬 후부터 질 때까지 어떤 음식도 취하지 않는 것이 바로 라마단 금식이다. 하지만 이 금식기간에도 먹음의 행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해가 떨어진 후 사원을 중심으로 모여 무슬림 공동체가 함께 즐기는 이프타르(Iftar, 저녁식사)가 이 종교에서 음식과 먹음의 행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확인해준다.

 

 

                (출처: Korea.net (www.korea.net))

 

 

그 밖에 여러 샤머니즘 전통에서도 굿거리를 위한 푸짐한 한상의 식탁은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전통에서 이뤄지는 먹음 행위는 주로 의례의 한 요소로 들어와 있고, 그것은 제의(제사)로 정형화되어 있다. 따라서 일상적 생활세계에서 행해지는 식사행위와는 달리 엄격한 순서와 엄별한 식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종교전통의 제의에 제대로 집중한 종교학자로는 노르웨이의 크리스텐센(Brede Kristensen, 1867-1953)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특별히 고대인의 종교전통에서 제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스텐센은 고대 종교의 제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지는 기능, 내지 역할 때문이다. 그는 연구를 통해, 고대인들에게 제의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제의의 중앙에는 먹음의 행위가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먹는 일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된다. 크리스텐센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인간의 기원을 땅으로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땅의 소출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자원이 되며, 따라서 땅은 생명을 품고 있는 신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신은 땅을 비롯한 자연을 만들고, 그것은 다시 신적 에너지를 품고 다양한 식재료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신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에 땅의 소산 역시 그 신적 에너지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땅의 산물로 연명하는 인간 역시 신적 에너지를 나눠받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생명의 순환 고리를 타고 신과 인간은 하나로 이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대인은 이런 순환구조 속에서 신적 에너지의 약화를 읽고 있다는 점이다.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기에 주기적으로 그것을 다시 보충해야 한다. 땅 역시 신이 만든 피조물. 따라서 신의 힘을 담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을 위해 땅이 소산을 내어 그 힘을 나누어 주었기에, 혜택을 받은 인간 역시 때를 따라 신에게 무언가되돌려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쌍방적이며 인간은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해 신에게 의존하며, 신 역시 에너지의 보충을 위해서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때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종교적 행위가 제의이며, 이 제의의 심장부에 바로 먹음의 행위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의 생각 속에 먹는다는 것은 생존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이면서 동시에 신, 혹은 절대 생명과 자신을 연결하는 종교적 행위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식사행위는 곧 종교 행위라 해석될 수 있으며, 제의와 연관된 공동식사는 신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현장이 되며, 아울러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영성적 통로가 된다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먹음의 행위는 일상적 생명연장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 신과의 교류’, ‘신과의 합일’, ‘우주 질서에의 편입등을 함주하고 있음을 종교의례의 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먹음을 생각하면 그것을 위한 준비와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식사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만이 아니라 신을 만나고, 우주의 핵심과 교류하는 신성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먹음의 행위가 자꾸 대상화되고 상품화되어 간다. 음식을 준비하며 기대하고 생각해야만 했던 신, 혹은 우주의 원리에 대한 배려는 망각한지 오래이다. 우선 급한 것이 지금 주린 배이고, 수량화되어 파악되고 있는 생명의 가치이다. 따라서 몇 칼로리를 보충하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먹음의 준비도 소홀해지고, 먹는 과정 역시 단출해졌다.

 

성스럽던 먹음의 행위는 단거리 경주처럼 빨리 처리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치부되어 버렸고, 따라서 먹음의 행위는 시간에 종속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런 배경 속에 이른바 페스트 푸드라 불리는 정크음식들이 현대 음식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 어떤 연유로 이런 천박한 식사습관이 현대인을 지배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를 우리는 음식과 식사에 대한 진지했던 이전의 생각을 망각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음식을 취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그리고 먹을거리를 인간에게 선사한 존재를 기억하며 그 모두를 하나로 이어보려고 했던 옛 사람들의 지혜를 잃어버린 탓에 지금의 우리는 매우 천박한 음식문화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닌지.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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