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다윗 이야기

바라고 바라던 왕이 되다!(1)

by 한종호 2015. 9. 9.

윗 이야기(10)

 

바라고 바라던 왕이 되다!(1)

– 하지만 치러야 할 값은 컸다

 

1.

 

사울의 파란만장한 생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윗이 블레셋 지휘관들의 불평 덕에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전쟁하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간 후 길보아 산에서 두 나라 군대가 맞붙었다(사무엘상 31:1). 전엔 전차가 주요병기였던 블레셋 군대가 산악지대 전투에서 맥을 추지 못했는데 이때는 블레셋 군대가 업그레이드되어 전차 없이 산악지대에서 싸우는 법을 익혔나 보다. 이에 이스라엘 군대는 맥 못 추고 패했고 사울의 세 아들인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전사했고 사울도 화살을 맞았다. 이에 사울은 무기 담당병사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지만 그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왕을 찌르지 못했다. 이에 사울은 자기 칼 위에 엎어져서 죽었고 그의 무기 담당병사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골짜기 건너편과 요단 강 건너편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의 군대가 패하는 걸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성읍들에 들어와 살았다고 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후에 벌어진 일이다.

 

사울이 죽은 다음날, 그의 시신을 발견한 블레셋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목을 자른 다음에 온 블레셋 땅에 승전보를 전했다. 그들은 사울의 시신을 벳산 성벽에 달아뒀는데 나중에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 시신을 수습해서 야베스로 가져다가 화장한 후 뼈를 에셀 나무 아래 묻고 7일 동안 금식함으로써 사자(死者)에 대한 예를 갖췄다고 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고 흙으로 돌아갔다. 야훼의 ‘신뢰’를 받아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됐지만 야훼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기에 불행해진 왕, 야훼의 ‘사랑’을 듬뿍 받는 다윗이 무대에 등장하자 그에게 주연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왕,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심한 정신적 동요와 불안 가운데 살다가 끝내 숙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울, 그를 위한 조가(弔歌)는 그를 비극에 빠뜨린 다윗이 지어 불렀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다윗이 아말렉을 몰살하고 시글락에 귀환한지 사흘 째 되던 날, 사울의 진에서 한 젊은이가 다윗에게 와서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며 애도를 표현하더란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사울의 진에서 왔다는 그가 이렇게 보고했다는 거다. “우리의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달아나기도 하였고 또 그 군인들 가운데는 쓰러져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단 왕자께서도 전사하셨습니다.”(사무엘하 1:4).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모두 죽었다는 거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의 맘이 어땠을까? 기다리던 소식이었을까? 가슴이 메어지는 슬픈 소식이었을까?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내내 쫓아다녔다. 그를 피하려고 원수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나. 그런 사울이 죽었다니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을 터이다. 사울을 잇는 다음 왕으로 야훼의 선택을 받았다며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은 이후 그는 줄곧 이 날만 기다려왔을 터이다. 야훼의 약속이 언제 성취될지 손꼽아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을 거다. 그가 사울의 왕위를 노리고 있음은 온 세상이 아는 사실이었으니 그가 사울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다면 그 동안 들였던 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겠다.

 

그에게 사울의 죽음에 대해 알리바이를 제공해준 사람은 그 소식을 전한 아말렉 젊은이였다.

 

“제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 임금님이 창으로 몸을 버티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적의 병거와 기병대가 그에게 바짝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울 임금님이 뒤로 고개를 돌리시다가 저를 보시고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저더러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말렉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사울 임금님이 저더러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일어나서 사실 것 같지 않아서 다가가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머리에 쓰고 계신 왕관을 벗기고 팔에 끼고 계신 팔찌를 빼어서 이렇게 가져 왔습니다.”(6-10절)

 

그는 사울의 죽음을 이렇듯 비교적 상세하게 전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사무엘상 31장 얘기와는 사뭇 다르다. 거기선 사울이 자살했다지 않았나. 두 얘기가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둘 다 거짓말이다.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아말렉 젊은이가 우연히 그의 시신을 발견해서 왕관과 팔찌를 벗겨서 그걸 다윗에게 가져왔을 수는 있다. 더 많은 보상을 바라고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말했을 수는 있다.

 

요즘 같으면 그게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중요했겠지만 다윗에겐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터이다. 자기 책임만 아니면 누가 어떻게 죽였든 달라질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말렉 젊은이가 상황 파악 못하고 자기가 죽였다고 자백했으니 다윗으로서는 그 이상 좋을 수는 없었을 게다. 더욱이 그는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왔다. 다윗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게 바로 이것 아니었나. 이걸 보면 젊은이는 다윗이 뭘 바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왜 다윗에게 가져왔겠는가. 사울 유가족에게 갔어야 할 물건들을 다윗에게 가져왔다는 얘기에는 이를 통해 차기 왕이 누군지를 보여주려는 설화자의 의도가 반영됐다고 보인다.

 

다윗은 아말렉 젊은이의 보고를 듣고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슬픔을 누르지 못해서 옷을 찢고 울며 금식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런데 청년에게 다윗은 “네가 어떻게 감히 겁도 없이 손을 들어서 야훼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살해하였느냐?”(14절)라고 호통치고 부하를 시켜 그를 죽였단다. 막대한 보상 받길 기대하고 온 청년은 보상은커녕 졸지에 불귀(不歸)의 객이 돼버렸다. 다윗은 숨이 넘어가는 그에게 “네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너의 입으로 ‘야훼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제가 죽였습니다.’ 하고 너의 죄를 시인하였다.”(16절)라며 ‘확인사살’했다.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손을 씻었던 것처럼(마태 27:24) 다윗은 아말렉 젊은이를 죽임으로써 사울의 죽음과 자신이 무관함을 세상에 보여줬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다윗의 의도대로 사울의 죽음에 다윗이 무관하다고 믿었을까? 그게 아니라 더 의심하게 됐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다윗이 아말렉 젊은이를 길보아 산으로 보내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오라고 시켰고 그걸 소유하게 되자 입막음하느라 그 젊은이를 죽였다고 보면 정치 공학적으로 맞지만 설마 다윗이 그랬겠는가!

 

그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조가를 지어 유다 사람들에게 부르라고 했다. 그는 다수의 시편을 지은 시인답게 다음과 같이 애절한 조가를 지었단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19-21절)

 

과연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다. 사울의 죽음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지 말라고 하니 말이다. 다음으로 사울과 요나단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자신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노래한다. 자신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 진했다면서 한없이 안타까워한다(26절). 그런데 사울과 요나단이 노래처럼 그렇게 가까웠나? 요나단은 아버지보다 친구 다윗을 더 사랑했다지 않았나? 사울도 요나단에게 ‘사생아 같은 자식’이라느니 ‘너를 낳은 네 어머니에게 욕일 될 뿐’인 자식이라느니 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지 않았나.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라고는 해도 납득할 수준은 넘어선 표현이 아닌가 싶다.

 

다윗의 조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고 ‘유다’ 사람들에게 조가를 부르라고 했을까? 사울은 유다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다윗은 유다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울을 위한 조가를 불러야 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둘째로, 다윗이 대체 누구기에 유다 사람들더러 조가를 부르라 마라 하는가? 그는 아직은 유다 왕이 아니다. 블레셋의 봉신 또는 용병으로 블레셋 왕의 녹을 받아먹는 처지에 자기가 뭐라고 조가를 부르라 마라 하는가 말이다. 그를 하루라도 빨리 왕으로 만들고 싶은 조급한 맘에 설화자가 실수했을까? 다윗이 이미 왕이 됐다고 착각했을까? 사울의 왕관을 다윗에게 가져온 아말렉 젊은이처럼 말이다.

 

2.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오랜 침묵을 깨고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요즘 한국 정치인이라면 현충사나 국립묘지를 방문해서 헌화했겠지만 그땐 야훼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가 유다에 있는 성읍으로 올라가도 됩니까?”(사무엘하 2:1). 야훼가 올라가라고 허락하자 그는 어느 성읍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고 야훼는 ‘헤브론’으로 가라고 알려줬다. 이에 다윗은 부하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는데 이때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동행했단다. 그들은 헤브론의 여러 성읍에 정착했는데 이때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의 왕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렇다니까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유다 왕 즉위 사이에는 연관이 없다. 다윗이 유다 왕이 되는 게 보기 싫어서 사울이 기 쓰고 그를 죽이려 했던 것도 아니고 사울이 살아 있기 때문에 다윗이 유다 왕이 못 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설화자는 사울이 죽으면 다윗이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그는 독자들 그렇게 믿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엔 아무 관련성도 없다. 사울은 유다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었으니 말이다.

 

다윗이 유다 왕으로 즉위한 데도 의문점이 적지 않다. 그는 직전까지 유다의 천적 블레셋에 투항했던 인물 아니던가. 유다든 이스라엘이든 다윗을 왕으로 세울 이유는 없었다. 왕으로 세우기는커녕 ‘배신자’로 처벌해야 할 자였다. 세상 어느 백성이 배신자를 왕으로 삼고 싶겠나. 왜 다윗이 다른 데가 아닌 ‘헤브론’으로 올라갔는지도 궁금하다. 왜 거기였을까? 야훼가 그리로 가라고는 했다지만 거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나.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유다 사람 전체가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 장로들이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를 왕으로 세웠을까?

 

왜 헤브론이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헤브론은 유다 중앙산악지대에 위치한 성읍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소가 있어서 제사가 행해지던 곳이기도 했고 아브라함이 살다가 죽어서 묻힌 곳이기도 하다(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야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창세기 13:18]; “그렇게 하고 나서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근처 곧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밭 굴에 안장하였다.”[23:19]). 곧 헤브론은 지정학적 위치도 좋았고 유서 깊은 신앙적 전통도 있었다. 또한 헤브론은 갈렙 지파가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했는데(민수기 13, 14장 참조) 다윗은 나발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결혼함으로써 갈렙 지파와 관계를 맺게 됐다. 따라서 갈렙 지파 지역인 헤브론은 다윗과도 무관치 않은 곳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설화자는 뜬금없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 예를 갖춰서 사울을 장사지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렸다고 말한다. 길르앗은 요단 강 동편 지역으로서 사울이 다스리던 곳이다. 다윗은 그곳 주민들에게 사절을 보내 사울에게 예를 갖춘 데 대해 그들을 칭찬하고 축복했다고 했다(사무엘하 2:6-7). 그는 “비록 여러분의 왕 사울 임금님은 세상을 떠나셨으나 유다 사람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았으니 여러분은 이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7절)라고 말했다는데 이 말은 위로의 말인 동시에 사울의 권한을 자기가 물려받았다는 선언이었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까닭이 무엇일까? 설화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으니 독자들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우선 유다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유다는 북쪽의 이스라엘과 서쪽의 블레셋 사이에 끼어 있었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마다 불안해했겠다. 블레셋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지중해로부터 가나안으로 밀고 들어와 자리 잡은 해양족속의 일부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에겐 공히 ‘침입자’였으니 유다로서는 블레셋보다는 이스라엘이 더 가까웠겠다. 더욱이 그들은 해안평야를 장악한 다음 동진했으니 그들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공공의 적이었다. 이스라엘은 그마나 그들과 맞서 싸울 만했지만 유다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블레셋의 상대가 못 됐던 거다.

 

그런데 그나마 유다의 배경이었던 이스라엘이 사울이 죽음으로써 큰 위기에 빠졌다. 유다에게 어떤 선택이 있었을까? 몇 가지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택은 동향인이고 사울 군대의 유능한 지휘관이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거였다. 그가 왕이 되어 자기들을 보호해주길 바랬던 거다. 걸림돌은 다윗이 블레셋의 용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믿을 만했을까? 생존을 맡겨도 될 만큼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유다 사람들이 얼마나 고민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 결정에 도움을 준 일은 다윗이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주변 족속들에게서 약탈한 물건들을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뇌물?)로 줬던 일이었을 거다. 다윗은 이때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을 거다. 이와 정반대의 추측도 가능하다. 다윗이 블레셋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유다 사람들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유다의 안전이었을 거다. 누구든지 블레셋만 막아준다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건 감수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을까?

 

요약하면, 유다 사람들에게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에게 미심쩍은 구석이 없진 않았지만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장로들)이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출처: http://www.exploretheway.org/2-samuel-discussion-notes/2-samuel-chapter-2>

 

 

3.

 

또 궁금한 점은, 블레셋은 다윗이 유다 왕이 된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 성읍을 내줘서 1년 4개월 동안 머물게 했다.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다윗과 함께 출정하려고도 했다. 아기스는 다윗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거다. 블레셋 군대 지휘관들이 불평했을 때도 아기스는 다윗을 가리켜 “그가 나와 함께 지낸 지가 이미 한두 해가 지났지만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하였소.”(사무엘상 29:3)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런 다윗이 유다 왕으로 즉위한 걸 시글락을 비롯한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배신자’라며 이를 갈았을까? 아니면 ‘용병 주제에 출세했네.’ 라며 놀랐을까? 설화자는 블레셋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다윗은 7년 반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렸다(사무엘하 2:11). 설화자는 그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지 않는다. 분명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텐데 설화자는 말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사울의 군대 사령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얘기다(2:8-9).

 

연대를 따져보면 사울이 죽기 전에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됐다. 사울이 죽은 직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됐다면 그가 왕좌에 앉아 있었던 기간이 불과 2년이었으므로 다윗은 사울이 죽기 5년 반 전에 유다 왕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은 다윗이 유다의 왕위에 오른 일이 사울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증거도 된다.

 

특이한 점은 7년 반 동안 유다와 블레셋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유다가 조공을 바쳤는지 아닌지, 유다가 독립을 선언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윗 또는 아기스가 상대방을 방문했다는 얘기도 없다. 그 정도로 구체적인 것까진 바라지 않지만 다윗이 헤브론에서 다스린 7년 반 동안 둘 사이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어떤 성격이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안 그런가?

 

일단 그 기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별 일이 안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일어났다면 설화자가 얘기했을 터이다. 다윗과 아기스의 관계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생각하면 그게 옳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곧 다윗과 아기스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맹관계’였으므로 동맹 파트너 다윗이 유다를 지배하는 게 블레셋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유다가 블레셋의 속국인 한 다윗이 왕이 됐다고 해서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길 이유가 없었다. 블레셋 입장에선 더 좋은 일이었을 수 있다. 그들의 주적은 유다 아닌 이스라엘이었으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더 근접해서 압박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추론에 놀랄 독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이전 장들에서 얘기한 대로 다윗은 사울에게서 쫓겨난 이후 ‘하비루’ 같은 삶을 살아야 했고 결국 블레셋에 팔려가 용병 노릇을 해야 했는데 그게 ‘시늉’만은 아니었어야 한다. 다윗에게 유다 사람으로서의 동족의식이 희박했든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 동족의식을 버려야 했든지 좌우간 블레셋의 아기스가 다윗의 충성심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기스는 다윗의 유다 왕 즉위를 ‘배신’으로 여기기는커녕 두 손 들고 환영했을 거다.

 

이 추론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다윗 편인 <역대기서>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기름 부음을 받아 유다 왕으로 다스렸다는 얘기가 통째로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왜 <역대기서> 역사가는 왜 이 얘길 전하지 않았을까? 실수는 아니었으리라. 다윗이 왕 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그걸 실수했겠는가. 그렇다면 의도적이었는데 이유가 뭐냐는 거다. <역대기서> 역사가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뺐을 리 없다. 안 그런가? 몰랐거나 자랑스럽지 않았으니 뺐을 거다. 그 이유가 당시 유다가 블레셋의 속국이었다는 점 외에 다른 게 있을까? 그러니까 <역대기서> 역사가에겐 다윗이 유다 왕 된 것이 자랑스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블레셋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란 거다. ‘추론’일 뿐이지만 이유 없는 추론은 아닐 게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군사령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으로 데려가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사무엘하 2:8-9). 사울의 세 아들도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했으므로 왕위가 그에게 주어졌던 거다. 이때 그의 나이가 마흔 살이었는데(10절) 어떻게 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았는지, 나갔는데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때 왕의 권위는 전쟁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는 데서 얻어졌으므로 어떤 이유로든 패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에 마이너스 요인이었을 게다. 안 그런가?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