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의 윤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4)

 

응시의 윤리

- 전집 4권 『성서 연구』 「율법의 완성-간음과 이혼」 -

 

 

내가 김교신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의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와 도덕에 엄격하다는 점이다. 나 역시 ‘율법주의자’는 아니지만(글쎄 내 생각이기만 할지도),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꼴’은 나나 남이나 잘 못 견디는 편이다.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는지, 미국에서 목사안수과정을 밟는 중에 받았던 인성 테스트에서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평가인즉, 내가 목회를 한다면 교인들에게 너무 엄중한 윤리적 잣대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가정사로 인해 결국 안수를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족이 길었지만, 내 성향이 그러하다보니 김교신의 ‘극단의 도’가 나는 참 좋았다.

 

김교신의 엄격한 윤리적 수행성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배경을 말해야할 것 같다. 김교신은 아주 어려서(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다. 홀로 되신 어머니는 행여 아버지가 없어 버릇없이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셨던 것 같다. 하여 더욱 엄격하게 도덕적 훈련을 시키신 것으로 안다. 유교적 지식에 해박하신 분이셨기에 훈련의 준칙은 유교적 도덕률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 더하여 스무 살 무렵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김교신에게 기독교적 가르침은 ‘전적(全的) 기준’이 되어버렸다. 가정과 일터, 성경공부 모임과 『성서조선』 간행에 이르는 벅찬 일정 가운데서도 성실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삼중겹의 도덕 훈련 덕분이었을 거다. 오죽했으면 동료교사와 바둑을 두다 보내버린 세 시간의 여가를 놓고도 산상수훈을 적용했을까. 그만한 일로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만큼’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일상을 어찌 살겠나,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일이다.

 

 

 

 

 

그런 김교신이었으니, 만약 그가 요사이 매일 들려오는 사건·사고들을 듣는다면 어찌 반응했을지 궁금해진다. 얼마 전에는 놀이시설 여자 탈의실과 샤워장을 몰래카메라로 찍어 동영상을 팔다 잡힌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그런 행위로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는 발상도 어이없지만, 그걸 또 돈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은 뭔가 싶다. 하긴 ‘하의 실종’이니 ‘시스루 룩’이니 ‘입다 만 것 같은’ 패션도(음, 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인가보다.) 결국엔 입는 이나 보는 이나 ‘몸’의 응시를 염두에 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오늘날의 문화를 ‘육체문화’라고 부르는 사회학자도 있다. 사람이 언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 왜 오늘날을 유난히 ‘육체문화’라고 이름붙이는 걸까? 인간 육체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전통사회에서 육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생식과 노동이었다. 때문에 튼튼한 몸이 기대되었고 그 몸은 감상용이 아니라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몸이었다. 그러나 소위 ‘현대(modern)’ 사회로 진입하면서 생산 수단으로서의 몸의 기능은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여전히 다수의 서민들은 노동을 하지만 그것이 꼭 ‘육체적 힘’과 직결되는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노동이나 신체의 부분노동 측면이 더 많다. 또한 ‘생산’하는 자녀들의 숫자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남은 몸의 활용도는 ‘즐기는(성적 쾌락을 포함하여)’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거다. 상업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후기 상태에 와 있다 보니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몸은 이제 소비의 도구를 넘어 사람을 ‘등급매기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나의 몸을 경이롭게 쳐다봐 준다면 그것이 ‘경쟁력’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이다. 타인의 시선을 훔쳐라! 나를 보게 만들어라! 이러한 응시의 명령이 마치 도덕률이라도 되듯 우리의 문화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너도 나도 ‘탐나는 몸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니 맞다. ‘육체문화’의 도래다. 이제는 몸에다가 도덕 판단을 부여하는(‘착한 몸’이라는 표현)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니! 예수의 윤리는 과연 이 ‘육체문화’의 한가운데서 적절한 윤리적 선언일까? 아니 세상을 살며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있는 걸까? 이에 대해 김교신의 생각은 단호했다.

 

간음(moicheia)이란 유부녀와 그 본 남편 이외의 딴 남성과의 불륜의 관계를 칭함이니,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즉 타인의 처는 범할 것이 아니며, 인처(人妻) 된 자는 다른 남성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 모세 계명의 주안점이었다. …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에 대하여 ‘오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여, 예와 같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진개(陳開)가 시작된다. 즉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벌써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행위의 말엽(末葉)을 논함이 아니요, 그 동기의 대두(擡頭)하는 곳을 다스리신다.

 

그러게 말이다. 모세의 법 지키기도 힘든 시절에 예수는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신 게 아닌가?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던 당시 문화권에서는 실제로 율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처첩을 거느리는 욕망을 실현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경건한 유대인’입네 자부심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임자 없는 여인’이라면 ‘보고’ 품는 음욕쯤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나? 더한 일도 가능할 터인데... 지참금을 내고 데려오면 될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응시’의 윤리성이 더 근본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간통이 형사법 상의 효력이 있던 당시에도 법적인 관건은 현장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했어?” 부부 관계의 신뢰성이 깨진 마당에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 역시 이게 제일 중요한 집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김교신이 읽어낸 예수의 윤리는 이런 법적 실체성을 넘어선다. 문제는 오히려 ‘동기’요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여인(혹은 남자)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는 유부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볼 때에 사념을 품음은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다. 예가 아닌 언사와 몸짓이 간음인 것은 물론이다. 누가 능히 핑계할 자인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고,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베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니라. … 눈과 손을 운운한 것은 육체 중에서도 가장 근이(近易)하게 사념(思念)의 중개를 하는 기관인 까닭이다.

 

또 나왔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빠지느니 눈과 손을 우리 몸에서 떼어 내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극단의 도’ 말이다. 더구나 김교신은 남녀 쌍방에게 이 ‘극단의 윤리’를 제안했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한다면 성한 눈과 손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아가 ‘이혼 금지’라는 더 엄격한 도덕규범을 제시한 김교신이고 보면, 오늘날 그의 윤리가 많은 기독 신앙인에게 은혜롭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김교신이 예수의 윤리에서 발견한 것은 ‘무조건 따라야하는 형식주의적 금지조항’이 아니었다. 김교신이 페미니즘을 모르던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그 시절 기독교적 결혼의 근본 원리에 대한 그의 해석은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도 솔깃한 부분이 있다.(물론 부분적으로)

 

기독교의 결혼관은 금전, 권세 등을 위한 책략 결혼이 아님은 물론이요, 단지 생식(生殖)을 위한 것도 아니므로 생남(生男)하지 못한 것으로써 칠거지악의 하나로 셀 수 없으며, 쾌락을 중심으로 한 것도 아니니 연애지상주의도 아니요, 우애결혼도 아니다. … 인간의 제반 관계 중에 부부의 관계처럼 오묘하고 심원한 것이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직접 관계한 원시적 제도였다. “사람이 홀로 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도와주는 짝을 만들리라.”(창세기 2:18)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돕는 배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곁에 서서 동등하게 마주보고 응시하며 도움을 주는 짝’이라는 말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오고가는 관계의 신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야 다른 동물들도 받은 축복이니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허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독처’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자유와 창조성을 자꾸 자기 확장과 타인소유에 사용하려 할 유혹을 가진다. 그걸 서로 견제해주면서 과한 욕망은 눌러주고 포기하려는 마음은 격려해주며 전인격적 관계 안에서 서로를 건설해가라고 만든 최초의 공동체가 바로 ‘나-너’(마틴 부버)라는 짝-공동체이다.

 

이 창조원리를 아는 신앙인이 아무런 사이도 아닌 몸을 뭐하러 훔쳐보겠나? 뭐하러 탐하겠나? ‘소비할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기는 내 짝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예수의 윤리를 ‘극단적’으로 읽어낸 김교신의 원칙은 이 시절에도, 아니 오히려 이 시절이기에 더욱 더 강조되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응시에도 윤리적 시선이 필요하다. 전인격체로 바라보고 ‘너’로 마주할 윤리적 의무 말이다. ‘응시의 윤리’!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뽕띠도 말했던 이 윤리적 시선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꽉 차 있을 때에야 자연스럽고 성실하게 일상 가운데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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