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1)

 

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

 

* ‘안으로의 여행을 떠나며

 

나는 이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며 되도록 행낭을 가볍게 했습니다. 행낭에 넣은 짐은 단 두 가지, ‘명상방석과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설교집’.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깨달음의 봉우리를 향한 여정 위에 있는 베이스캠프와도 같은데, 부득불 시간의 짐이나 공기, 물 같은 필수품을 챙기지 않을 수 없는 이 지구별 여행이 홀가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티베트의 차마고도(茶馬古道)보다 아득하고 묘묘한, 안으로의 여행에서 나는 내내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길동무로, 아니 나의 길잡이로 삼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신성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거친 길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오체투지를 내 몸으로 온전히 익히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 길잡이에 대해 윤똑똑이처럼 잘 아는 체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길잡이의 글의 매력에 이끌려 십 수 년 동안 그것에 심취해 온 애독자일 뿐. 시를 긁적이다가도 잘 풀리지 않으면 시적 흥취를 돋구어주는 그의 글들을 벗 삼았고, 목사로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도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땐 그의 설교문을 곁눈질하곤 했지요. 그의 글들은 언제나 메마른 영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 안의 창조의 샘에서 신선한 샘물이 솟구치도록 내 혼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최근에 나는 내 의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인류의 위대한 영적 유산 중의 하나인 <우파니샤드>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는데, 그것에 몰입하는 동안 나는 자주 내 길잡이의 글을 비교하여 뒤적거리곤 했습니다. 그 문화,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영적 유산들은, 인간의 영원하고 근원적 물음들을 탐구하는 데 좋은 선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지면의 글에서 그 두 사상을 학문적으로 비교하거나 분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위대한 사상의 빛에서, 오늘날 제도기독교가 상실한 궁극적 물음을 되살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근원과의 소통을 잃어버린 채 영적 치매상태 속에 있는 오늘의 우리가 진정한 자기다움을 회복하려면 고되고 힘들더라도 어둠 속에 감춰진 뿌리를 다시 더듬어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팍팍한 생의 행로에서 옹달샘을 만나면 거기 엎드려 목마름을 해갈하듯이 나는 틈틈이 내 길잡이가 으밀아밀 들려주는 빛나는 잠언으로 내 영혼의 갈증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그 잠언에 귀 기울일 때마다 서늘해져오는 내 소회를 몇 줄씩 명상노트에 옮겨 적었지요. 이런 소회 역시 내 길잡이와의 영적인 교감에서 온 것입니다. 남의 좋은 시를 지면에 베낀 한 시인이 자기가 공들여 베낀 것을 시로 쳐줄 수 없겠느냐고 말한 것처럼, 이런 옮겨 적음을 나는 내 마음 닦음[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깁니다. 덧붙이자면 내가 이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엑카르트의 글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긴이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도 밝혀두렵니다(매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김순현 역, 분도출판사).  그 역시 자신의 작업을 마음 닦음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하여간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내 길잡이도, 길잡이의 글을 옮긴이도, 그걸 또 옮겨 적는 나도, 그리고 이 서툰 글을 읽는 독자도 모두 같은 영적 여정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여정인 것입니다”(매튜 폭스)

 

* 하나님은 그 속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모신 영혼,

  곧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영혼을 찾아

 그곳에서 낳고 싶어 하십니다.

 

, 그렇군요. 하나님, 당신께서는 여전히 가임(可姙)의 욕구를 지니고 계시군요! 그렇겠지요. 당신께선 늙음이나 쇠락을 모르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당신께선 당신의 형상을 가장 쏙 빼닮은 사람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낳고 싶어 하신다지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분주하여, 낳고 싶어 하시는 당신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듣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짓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을 모실 여백이라곤 없답니다.

 

첨단의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해진 인간의 기심(機心)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어디서나 손가락 하나로 숫자를 눌러 사통팔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도 많아졌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당신을 아는 불멸의 지식을 섭취하는 일엔 한없이 게으르고, 소멸할 지식을 쌓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형국이지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

 

당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본()이고 나머지는 말()인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 본말이 뒤집혀져 있지요. 피조세계에 대한 숱한 지식은 당신을 아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데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피조세계에 대한 앎과 단()해야 한다는 거지요.

 

()!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조세계의 것들을 당신을 아는 지식의 칼로 단호히 잘라냄()으로서 우리 속에 하나님 당신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하는 데 말입니다. 그런 순수해진 영혼의 터라야 비로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낳을 수 있는 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당신이 곧 우리의 참 모습’(眞我)이지요. ‘영으로 난 것이 영’(요한 3: 6)이란 말처럼 전적으로 새로 난 생명인 것이지요.

 

이 신생(新生)의 기쁨,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라니요. , 우리 속에 당신이 태어나시다니요. 고맙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는 당신을 아는 일 말고는 세상에 대한 그 숱한 앎이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도 말했지요.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이 불안정한 가운데 세밀하고 파멸하지 않는 존재이니, 이제 학문의 그물을 버리고 참(진리)에 대해 명상하라.”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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