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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

밥을 제대로 모시면 그것이 곧 예배

by 한종호 2015. 7. 10.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7)

 

밥을 제대로 모시면 그것이 곧 예배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만물을 사랑하시되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으로 여겨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임낙경 목사님이 섬기는 강원도 화천의 시골교회에서 소박한 밥상을 받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수고가 어우러져 공들여 빚어진 밥상. 밥을 다 먹고 났는데도 입안에는 그윽한 산야채의 향이 고여 있었다. 빈 그릇을 부엌으로 가져가는데, 부엌 입구에 ‘밥’에 관한 글귀가 적힌 족자가 눈길을 끌었다.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조화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으니,

감사한 맘으로 먹게 하시고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여 식탐 말게 하소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공손히 삼키겠나이다.

 

이 글귀에는 밥을 ‘하늘’로 여기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 속에 이렇듯 밥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던가. 공경이란 문자 그대로 웃어른이나 하늘을 모시는 극진한 마음이다. 과연 우리가 밥을 제대로 모셔왔던가. 밥을 제대로 모시면 그것이 곧 예배이며, 밥을 제대로 모시면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일이 아니던가.

 

 

 

오늘날 우리가 밥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은, 먹거리가 너무 흔해빠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다녀 봐도 풍광 좋은 데는 보이는 게 ‘가든’이요, 신도시가 형성되면 먼저 생기는 게 숱한 먹거리집들이다.

 

어쩌다 한정식 집 같은 데를 가면, 수십 가지의 반찬이 나온다.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로 우리는 솔로몬 왕을 꼽지만, 만일 솔로몬 왕이 우리 곁에 살아 와서 왕도 아닌 평민들이 산더미 같은 진미를 즐기는 것을 보면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못 먹고 죽은 귀신’이란 말이 있지만, 너무 가난해 못 먹어 죽은 귀신의 후손들이라 그런 걸까.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치지만, 먹다가 내버린 음식이 한 해에 몇 천 억이 되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이다. 혹자는 ‘음식문화’가 발달했다고 들먹일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풍성한 먹거리는 있으나 ‘음식문화’는 없다. 음식문화 운운하려면 삶의 철학이 깃들여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걸신(乞神) 들린 것처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폭식을 즐기다 버리는 우리의 먹거리 풍습 속에는 ‘삶의 철학’은커녕 ‘삶의 낭비’만 있을 뿐. 낭비하는 삶이란, 생명을 생명으로 대접하지 않는 삶이다. 우리의 밥상에 올려진 밥과 반찬들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생명들이 아닌가. 우리를 위해 밥상에 올려진 푸성귀 한 잎이라도 먹다가 버리는 것은 생명의 존엄을 상실한 행위이다. 쌀 한 톨, 상추 한 잎도 우주생명의 일부. 너무 흔하다고 그것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삶의 낭비요, 우주생명의 손실이다.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만, 우주 안의 다른 생물들도 자신들의 권리가 있다. ‘물권’(物權)이라 한다던가. 땅별의 종의 일부인 인간이 ‘인권’을 주장하면서 ‘물권’을 도외시하는 것은 스스로 공평함을 잃은 처사이다.

 

우리가 진정 깨어 있다면, 쌀 한 톨, 상추 한 잎이 ‘물권’을 돌려 달라고, 왜 우리를 낭비하느냐고 울부짖는 말없는 외침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옛 수도자들은 우리가 일생 동안 먹을 음식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먹거리가 눈앞에 잔뜩 쌓여 있다고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그만큼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물론 수명의 단축만을 염려하고 장수를 탐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을 모시는 거룩한 성소(聖所)로서의 몸의 유한성을 인식하자는 것이고, 더 나아가 선물로 주어진 먹거리에 대한 고마움을 지니고 음식을 대하자는 것이다. 현대인의 대부분의 질병은 먹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기보다는 너무 먹어서 생긴다.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인공적인 것이지만, 그 인공적인 것을 받아들여 바깥으로 배설하기까지의 과정은 자연이다. 즉 입에서 항문까지의 과정은 자연이라는 말이다(김용옥).

 

이 자연의 과정을 망각하고 탐식(貪食)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한 몸의 유한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몸의 유한성을 거스르면 몸도 영혼도 병들고 만다.

 

평상시보다 우리가 음식을 조금만 더 먹어도 게으름은 우리를 침상으로 데려가지 않던가. 인도의 한 경전은, 지나친 탐식은 우리를 ‘암흑’(타마스)으로 이끌어간다고 한다. 영적인 암흑으로!

 

과식한 뒤에 흐리마리한 정신으로 무슨 경전이 읽힐 리 없고, 미식(美食)을 찾아 헤매는 이가 어찌 좁디좁은 ‘영혼의 오솔길’을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겠는가. 또한 미각과 촉각의 향락문화에 혼을 빼앗기고 사는 이가 어찌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을 들을 수 있겠는가.

 

달콤함만을 탐하며 사는 자는 고통스럽게 죽는다. 제 육신만 섬기는 자는 영혼을 먹이지 않는다. 우리의 입과 혀의 횡포를 통제하지 못하고서는 영성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잘랄루딘 루미의 말처럼 우리가 물질계(物質界)에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영계(靈界)에는 더 많이 잠들어 있는 법!

 

고진하/시인, 한 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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