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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유철의 '음악정담'

사제가 된 비르투오조

by 한종호 2015. 6. 23.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5)

 

사제가 된 비르투오조

- 프란츠 리스트(4) -

 

 

리스트는 1865년부터 1886년에 타계할 때까지 검은 수단(soutane)을 입은 가톨릭 성직자로 살았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신기하다” 또는 “뜻밖이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신기하고 뜻밖인 것은 성직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모차르트에 비견될 만큼 피아노 신동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정상을 지켰던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가톨릭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반복해 졸랐던 것은 16-17살의 사춘기 때 일이었으니 한 때의 치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성경을 열심히 읽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인이나 순교자가 되기 위해 사제가 되려는 열망을, 유럽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음악가가 되어서는 물론 50이 넘도록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리스트는 귀족이 아니란 점만 빼고는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처럼 부모 사이가 나쁘거나 형제들이 일찍 죽는 슬픔을 겪지 않았고, 다른 음악가들처럼 집안이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부친 아담 리스트는 헝가리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토지 관리인으로 4-5만 마리의 양을 기를 만큼 부유했습니다.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에게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년이 지나자 뛰어난 초견(初見) 능력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살의 나이에 기초 수준의 작곡도 했습니다.

 

9살 때의 첫 공개연주는 반응이 좋아 한 달 뒤인 1820년 11월 16일에는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초대를 받고 생의 두 번째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어린 천재 모차르트와 비교하기 시작했고, 헝가리 귀족들은 리스트가 당시 세계 음악의 수도인 빈에 유학할 수 있도록 6년 동안 매년 600굴덴의 후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아담 리스트가 가족을 이끌고 빈으로 이사를 한 것은 1821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아들을 빈에서 가장 저명한 피아노 스승 카를 체르니와 영화 아마데우스로 유명해진 살리에리에게 작곡 수업을 받게 했습니다. 1822년 12월에 열렸던 리스트의 빈 데뷔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당시 11살이던 리스트는 당시 25살이던 슈베르트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 리스트는 슈베르트 음악을 좋아해서 56곡의 가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유럽 전역에 알렸고,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인 <더 그레이트>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빈 데뷔 연주 이후 약 4개월 동안 파리 살롱 등을 돌며 연주를 하던 리스트는 1823년 4월 13일에 다시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두 번째 공식콘서트를 가진 것입니다. 가을이 되자 리스트는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도시의 순회 연주를 하고 가족과 함께 12월에 파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리스트의 파리 음악원(원장 케루비니) 입학은 거부되었습니다. 그래서 체르니나 살리에리에게 사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리스트의 파리 데뷔 연주는 1824년 3월 7일 루브와 극장에서 있었습니다. 5월에는 영국 런던까지 진출해 궁정이나 살롱에서 연주를 하다가 6월 21일 공식 데뷔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1825년에는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연주 여행을 하고 6월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조지 4세 앞에서, 그리고 극장에서도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1826년에는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순회 연주를 하였고, 이후에는 스위스 제네바와 루체른에서도 연주회가 이어졌습니다.

 

리스트에 대한 유럽의 주요 도시의 초청은 그가 작곡에 전념했던 13년 동안의 바이마르 시절은 물론 가톨릭 성직자로 살았던 생의 말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돈을 받던 콘서트를 무료로 전환하거나, 피아니스트로만 아니라 오페라와 콘서트 지휘자로 무대에 오른 것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잘 나갔던 리스트, 그것도 어느 한 때가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잘 나갔던 리스트가 이처럼 54살에 하급 사제 사품을 받을 때까지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놀랍습니다.

 

54살에 사제가 된 리스트가 신기하게 보이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목사가 된 대다수 목회자들과 매우 다른 동기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저것을 하다가 모두 망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리스트가 1865년에 성직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제가 되려면 7품, 즉 수문품, 강경품(삭발), 독서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을 받아야 하는데 리스트는 4품인 시종품까지만 받았습니다.

 

 

 

 

 

그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가 7품 성사를 모두 받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14년 동안 미사를 집례하거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는 준 사제로 살았습니다. 리스트의 신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79년 10월 12일입니다. 자신의 후원자인 호헨로에 추기경으로부터 ‘알바노의 수사신부’로 승격되면서 수도원장이 된 것입니다.

 

1879년에 수도원장이 된 이후 한 신문기자로부터 ‘음악을 포기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리스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직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은 세상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 아니며, 특히 나의 예술에 대한 무력감으로 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에 대한 혐오감이나 예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사제가 된 것이 아니란 리스트의 고백은 한국 개신교에 던지는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그의 동기는 세상에서 이것저것 하던 일이 모두 실패하자 신학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악적으로는 사업적으로든 실패를 몰랐습니다. 아니 연주와 창작 모두에서 최고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그가 시작한 교향시란 단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은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드뷔시 등등의 작곡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쇤베르크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12음기법이란 무조(無調) 음악을 리스트는 무려 68년 전에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리스트가 캐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자 성직을 결심했다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3년 사이에 20살이 된 아들과 26살의 딸을 잃은 충격 때문에 성직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에 대해 《반 룬의 예술사》는 다른 해석을 합니다.

 

그 무렵 리스트는 자신의 명성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보통 사람 100명의 야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영화를 누렸다. 마지막에는 더없이 충실한 여성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번역자는 후작으로 표기)에게도 흥미를 잃었다. 쉰이 다 된 나이에 비가 올 때는 비옷을 입으라든가, 식후에 코냑은 소화에 나쁘니까 두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리스트는 헤어지자는 뜻을 비쳤다. 마침 그때 후작부인은 평민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리스트가 재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영원히 붙잡힐 판이었다. 그 문제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식으로 해결되었다. 가족의 반대를 이유로 두 사람의 결합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호헨로에 추기경은 리스트를 사제로 서품했다. 조용하고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인 해결이었다. 성직자가 된 리스트는 이제 모든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여전히 후작 부인의 충실한 정신적 친구였으나 결혼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리스트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결혼에 소극적이 된 것이 그녀의 보수 신앙에 대한 강요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폴란드 대지주의 딸이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17세 때 러시아 니콜라스 자인 비트겐슈타인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극단적인 성격차로 인해 두 사람은 결혼 3-4년 뒤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공작부인은 로마 교황청과 긴 이혼 소송을 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압에 의해 결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비트겐슈타인 왕자와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남편의 훼방으로 끝내 이혼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리스트가 공작부인을 만난 것은 1847년 2월 키예프 연주회 때였습니다. 당시 28세였던 공작부인은 리스트보다 8년 연하였습니다.

 

공작부인과의 만남은 리스트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공작부인의 권유로 리스트는 비르투오조의 생활을 청산하고, 바이마르에 정착해서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1872년부터 죽은 1887년까지 남긴 24권 중 신학 관련 서적이 꽤 될 정도로 신앙이 매우 깊었다는 것이 음악사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공작부인이 쓴 저작에는 불교와 기독교, 불교와 유대교와 마르틴 루터, 그리고 신구약 성경에 관한 연구, 특별히 사도 요한의 계시에 대한 연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바그너, 베를리오즈 등의 진보적 작가나 음악가들과 친분이 깊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집단에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때문에 공작부인의 끊임없는 보수적인 신앙에 대한 강요나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한 반대 등으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전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리스트는 공작부인과 결혼이 거의 성사될 즈음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생일에 맞춰 결혼식을 하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 수속에 피치를 올리고 있을 때 말입니다.

 

 

 

 

 

리스트가 죽은 후 8개월을 두문불출하던 공작부인은 1887년 3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토록 문학과 신학에 두루 조예가 깊고 신앙이 좋았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딸아이와 함께 리스트와 동거에 들어간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파격은 보수 신앙이 두텁던 공작부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자살은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의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당혹스런 문제를 던져줍니다. 잘 믿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리스트가 태어난 곳은 1921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편입된 도시 쇼프론 근처의 작은 마을 라이딩입니다. 리스트 당시 이름은 도보리얀이었지만 말입니다. 최근 20-30년 동안 약 400명의 인구가 늘어났는데도 현재 1300명의 주민이 살 정도로 작은 마을에서 리스트는 태어났습니다. 라이딩은 행정구역상 남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주에 속합니다.

 

부르겐란트에 있는 주립 박물관에는 리스트의 유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리스트가 여행 때 가지고 다녔던 간이 제단입니다. 지금처럼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높이가 1미터가 넘는 여행용 간이제단을 가지고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불편을 감수하고 요즘 교회의 작은 강대상만한 제단을 갖고 다녔습니다. 그의 신앙이나 성직이 단순한 장식 이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물증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벌써 글이 길어졌습니다. 성직자가 된 이후 그가 남긴 종교적 작품과 그의 삶의 이야기는 다음에 써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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