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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폐허의 잔해 위의 남은 사랑

by 한종호 2015. 5. 24.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9)

 

폐허의 잔해 위의 남은 사랑

- 인간들은 잔인하고 인간들은 친절하다(라빈드라나드 타고르) -

 

 

설교자에도 비관적인 설교자가 있고 낙관적인 설교자가 있다고 한다. 나는 점점 비관적인 설교자가 돼 가는 나를 본다. 물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비관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 상당한 낙관적 행운을 누려 왔다. 감사하게도 극단적으로 혹독한 지경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어려움이야 늘 있었지만, 가령 내 아버지처럼 오늘이라는 날의 참담함 때문에 내일을 맞는다는 게 상상이 안 되는 절망 가득한 삶의 굴곡을 육체에 걸머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보다 젊은 나이에 세 명의 어린 자녀를 잃는 참척을 당하셨다.

 

사람들이 더러 혹은 자주 나에 대해 부정적이다, 래디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아끼시는 장모님께서도 내 글을 읽으시곤 얼마나 어렵게 자라났으면.....”하시면서 뒷말을 생략하셨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었다. 나는 놀란다! 진짠가?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부정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더러 나에게 부정적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증거(?)를 발견할 때도 있다. 즉 부정적인 나는 그럭저럭 낙관적으로 잘 살고 있는데 나에게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그는 오히려 나보다 훨씬 요철이 심한 부정(不定)의 산악과 저지대를 오르내리며 힘겨워하는 것이다. 이게 나에게는 여전히 의아스러운 점이다.

 

나 자신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겉 표면의 보이는 판단에 의해 대강 살아간다고 보인다. 대충 살지 않으려면 사실 힘이 많이 든다. 그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정신과 윤리성의 힘으로 결국 육체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림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겉 표면에 보이는 자기의 투사에 속지 않고 그것의 속임의 위력과 허위의 기술을 간파하는 것이다. 가령 이러한 자기 투사의 확인은 적대적인 대상에 대한 나의 느낌과 상상 속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속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콤플렉스이거나 나 자신 자체이다. 그러나 속으면(대개는 속는다) 상대방을 계속해서 괴물로 만들어 나가는 확신의 시나리오가 된다. 자기 대본의 작가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 점이 우리들의 불행의 원천이 아닌가.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사실은 나에게서 자기의 부정을 보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보는 나는 나의 판단이야말로 매우 긍정적인 세계인식을 하는 것이라 믿고 있으니 말이다. 하이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사이를 판단하실 것이다. 자기가 진실로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마태복음 11:19)’.

 

 

 

 

우리는 자신의 심리학을 남에게 투사함으로써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투사 자체가 벌써 속은 거라면 인간 역사의 진행이란 완전 난센스요 본래 막장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난센스와 막장스러움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야말로 오로지 밑도 없고 끝도 없는 자기투사로만 살아가는 환상적인 인간군()이다. 그중에는 사기꾼도 있고 정치꾼도 있고 사회운동꾼도 있고 목사꾼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과대망상에 걸린 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디가 아픈 것일까? 그것을 일깨울 약은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든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진짜로 동정할 수밖에 없는 아픈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떨까? 현저한 사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이 세상에 장애인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과 죽음 당하는 이웃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들도 우리처럼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이 아닐까? 성경은 이와 같이 인간을 공통적인 환자라 부르는데, 어떤 이들은 단지 몇 시간 전에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만으로 자기는 이제 병이 다 나았고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재빨리 여러 가지 놀이도구 가운데 의사 가운과 청진기를 집어드는 것이다. ‘병든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여전한 나의 불만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주 무언가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자기의 그 비판 역시 비판임을 모른다. 이 경우 비판 앞에 선행된 비판받을 행위가 나쁜 것인가, 그에 대한 비판이 나쁜 것인가, 그 비판을 비판이라 비판하는 그 비판이 나쁜 것인가? 처음 비판과 나중 비판이 각각 비판하고 옹호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오리무중에 빠지고 사회는 계속 투사(投射)의 투사(鬪士)가 늘어나면서 어수선한 상태로 희석된다. 이것이 존재와 인식의 허구렁, 즉 사단(Satan)의 도사린 음모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 들씌우기도 한다. 내 보기에 제 사단도 일개 사단(師團) 못지않고 제 이단(異端)도 이단을 넘어 사단 팔단의 경지인데 말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은 다 나이다. 나는 무의식적 투사의 전 체계를 통하여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것들은 나에게 말한다. 나에게 선택과 결정과 태도와 입장을 요구한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깨닫지 못할 정도의 기계적인 자율성으로 나에게 말한다. 누가 기계의 마음까지 느끼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잘 나가는 동안은 기계적 자율성의 콘베어벨트는 유익하기까지 하다. 실수로 손가락을 자를 수도 있는 자동화의 폭력성은 편리의 무감각 속에 감추어져 있다. 주인은 기계의 의도 따위엔 전혀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기계의 오랜 과부하가 적정 지점에 이르면 자기 파괴의 편집증과 신경증이 시작된다. 그때부턴 사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 것이다.

 

육체가 아직 젊고 힘이 넘쳤을 때, 인생이 여전히 준비 단계처럼 인식될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도구들이 거기서 벗어나고자 해도 못 벗어나는 반란으로 작동할 때가 온다. 한 잔 걸치면 기분이 좋아지는 알코올처럼 그것들은 자신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나중에는 오로지 술을 끊는 것만이 인생의 전적인 문제가 돼버리는 사람이 있다. 단지 그걸 해결 못해서 그는 인생을 망친다. 과연 그럴까? 그의 문제는 알코올 때문일까? 그에게 알코올이란 무엇인가? 섹스도 도박도 심지어 아무 생각도 표현도 없는 과묵한 사람의 무덤덤하고 지루한 생의 공허도인생의 모든 것들이 이와 같다.

 

지금 내가 수족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들도 언젠간 나에게 도움이 되기를 거절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나는 또 그것들과 싸워야한다. 그 배신감은 마치 온 세계가 나에게 적대적인 것처럼 여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오늘처럼 그때도 태평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그리스도인라고 예외는 없다. 신앙심 때문에 자살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19세기 책에서나 읽어봤다. 내 생각엔 오히려 신앙심이 깊고 의지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절망이 심각할 수도 있다.

 

세월이 갈수록 나이가 늘어갈수록 사람은 경직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더 이상 유교화되고 도덕화되고 화석화된 신앙, 혹은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으로 경직이 심화되어가는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는 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종이 위의 글자만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과거의 책들은 거기에 손가락을 간질이는 정도의 요철감이라도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책들은 그런 감촉마저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전체적 문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놀더라도 회피하더라도 게으름을 부리더라도 일단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진실한 행위이고 자기 책임을 다하는 첫 걸음이다. 아예 그런 게 있는 지 혹은 있어도 나는 모른다고 외면하거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고 하는 양극단은 세계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모르쇠 외면하는 것은 내면적 가난과 공허의 다름 아니고, 모든 일을 주님이 할 거라면 왜 인간이 생겼겠나?

 

이 세상에 이토록 무지막지한 일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둔감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들이 다 내 안에서 나에게 벌어진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이제 당장 내일이나 모레 원전이 터진대도 우리는 올 것이 왔구나정도일 공산이 크다. 휴전선에서 단 몇 시간 만에 몇 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는 국지전이 벌어진대도 그것이 끝나면 남과 북은 여전히 유지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상징행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무지의 열매를 먹으며 무지 가운데 살다가 무지 가운데로 돌아간다. 무지(無知)란 무엇인가? 무명(無明)이다. 빛 없음이다. 인식은 빛이며 자각은 불꽃, 곧 생명이다.

 

칼 융은 꿈의 상()은 꿈을 꾼 이의 정신적 요소의 콤플렉스라고 규정했다. 모든 내면적인 정신작업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은 오로지 자기 한 사람만을 초대한 극장과 같다. 꿈꾸는 사람은 그 극장의 지배인이자 영화 그 자체, 또한 연기자, 프롬프터, 감독, 저자, 관객, 비평가이다. 꿈은 꿈을 꾸는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자신의 은밀한 메시지다. 그러나 콤플렉스란 거대한 공동 지구를 말한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복잡한가? 헤아리지 않으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가 테세우스처럼 인간을 공물로 받아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것인가? 누가 아리아드네처럼 지혜롭게 명주실을 풀어 미노스의 미궁을 빠져 나올 것인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우리 정신의 구성성분이다. 나의 관념이다. 나의 꿈, 나의 생각, 나의 죄의식, 나의 부끄러움, 나의 게으름, 나의 우울기질, 나의 경박함, 나의 욕심, 나의 경쟁심, 나의 원망, 나의 분노. 이것들은 다 나의 구성성분이고 나의 관념이다. 이들은 외부적인 감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심혼(心魂)의 가장 내밀하고 친절한 감동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작용하면서 기계적이고 처절한 사랑의 의미를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폐허의 잔해 위, 패배의 굴욕 위, 결별의 아픔 위에 서게 될 때 오히려 정말 친밀해지는 애정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사랑은 소용이 없다. 아아, 정말이지 인간들은 잔인하고, 인간들은 친절하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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