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와 채현국의 이중창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2015. 5. 15. 14:10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0)

 

로시니와 채현국의 이중창

 

 

지오아키노 로시니(1792-1868)는 이태리 페사로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1816년에 작곡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1825년에 미국에서 최초로 공연된 이태리 오페라라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842년에 초연된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는 마리아의 노래 <스타바트 마테르>는, 그 해에 유럽의 29개 도시에서 공연이 될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볼로냐 초연 때 이 곡을 지휘했던 도니체티는 초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열광은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지막 리허설이 끝나자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귀가하는 로시니를 집까지 따라가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첫 공연 뒤 청중은 모두 그의 집으로 몰려가 창문 아래 둘러서서 ‘로시니’를 외쳤다.

 

오죽했으면 울리케 팀이 그의 책 《오케스트라》에서, “1816-1830년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로시니 열풍은 아마도 1960년대의 비틀즈 열풍과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고 썼겠습니까. 1823년 베네치아에서 발표한 오페라 <세미라미데>가 혹평을 받고 파리로 옮긴 일을 제외한다면 로시니는 평생 실패를 몰랐던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로시니가 당시 유럽에서 호불호가 분명한 작곡가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로시니의 음악은 주로 드라마틱한 음악을 선호하는 프랑스와 이태리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을 못 견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혁명을 지지하는 진보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던 구체제 사람들과 친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시니를 좋아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가장 성스러운 음악 중 하나인 <스타바트 마테르>마저 너무 화려하게 작곡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 음악이란 대성당에서 오르간과 합창으로 슬픔을 내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견딜 수 없는 불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교회음악에는 ‘오페라와 교회 음악의 잡종’ 내지 ‘세속화된 교회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습니다. 바그너는 <스타바트 마테르>의 성공에 배가 아팠는지 모르겠지만 “로시니가 신앙심이 깊다고 말한다면 온 세상이 ‘신앙 그 자체 일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독일인 중에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이나 하인리히 하이네처럼 로시니에 열광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이념적으로 하인리히 하이네는 혁명을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때문에 망명을 선택하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조국의 개혁을 말한 시인이었습니다. 반면에 로시니는 1830년 프랑스 혁명 때 로시니는 프랑스로부터 받던 종신연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자 6년의 법정투쟁을 불사한 외국인이었습니다. 연금도 연금이었지만 혁명 때문에 그 이전에 자기와 구축해 놓았던 파리의 오페라 극장과의 관계에도 적잖게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1848년의 이태리 혁명 때는 반동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이네에게 로시니는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시니를 위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로시니 선생은 최고의 마에스트로이며, 음악의 햇살을 온 세상에 비추는 이탈리아의 태양입니다. 선생의 예술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못하는 가련한 우리 독일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들이 선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생의 음악이 장미꽃으로 뒤덮여 있어, 사색적 무게와 철저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인들은 선생의 음악이 너무나 가벼운 날개를 달고 천상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시니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우선 그는 그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1829년 <기욤 텔>(독일어권에서는 빌헬름 텔, 영어권에서는 윌리엄 텔로 표기)이란 오페라 발표를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한 사람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기가 절정인데다가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로시니는 미련 없이 그 자리를 걷어찼습니다.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흥행 보장되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오페라를 써 달라고 졸랐지만 로시니는 39년 동안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로시니의 조기 은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워낙 게으른 사람이라서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고 수군댔습니다. 로시니는 14살에 오페라를 처음 작곡하여 37살까지 무려 37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1813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4개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의 상연 시간이 5시간이나 걸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한 편의 오페라는 1-2시간이 기본입니다.

 

오페라는 극장을 잡아야 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연습시켜야 하고, 무대 세트를 만들어야 하고, 가수들의 연기와 노래를 지도해야 하는, 그래서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려면 작곡이 끝난 이후 최소 몇 개월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오페라를 로시니는 25년 동안 37편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 작품들을 연습시켜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는 사실 로시니가 25년 동안 작곡기계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젊은 시절을 보낸 로시니가 게을렀다? 이는 사실과는 너무 다른 추측입니다.

 

로시니가 급변하는 시대의 음악적 요구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작곡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가 1842년에 초연한 <스타바트 마테르>와 1864년에 발표한 <작은 장엄미사>는 그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라는데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작곡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오페라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 또한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깁니다. 평생을 괴롭힌 질병 때문에 조기 은퇴가 불가피했다는 동정론도 있습니다. 이는 일리가 없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요리하는 일을 더 좋아해서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는 주장입니다. 로시니는 대단한 미식가였습니다. 윈디 톰슨은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전해 줍니다.

 

한 기자가 로시니에게, “당신은 대중 앞에서 평생 단 두 번밖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었다. 한 번은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실패한 이후에, 그리고 또 한 번은 피크닉 도중 송로버섯이 채워진 너무나 맛난 칠면조 요리가 강물에 빠졌을 때를 말한 것인데, 로시니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요, 단 한 번, 칠면조가 강으로 빠졌을 때 뿐입니다.”

 

로시니는 요리책을 썼고, 아직도 그가 만든 요리 이름과 레시피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로시니가 이 대목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시니는 죽을 때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내 펠리시에가 죽으면 고향 페사로에 자기 유산을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가 자신의 유산을 페사로의 음악 발전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기 은퇴와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시니는 은퇴 이후에 자기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후배 음악가들을 세워주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지에 따라 페사로에는 음악원이 창립 되었습니다. 그의 유산으로 설립된 로시니 음악원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매년 여름 페사로에서는 로시니 음악만으로 음악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로시니의 오페라를 부르는 가수들에는 한 번쯤 꼭 서야하는 꿈의 무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로시니를 주목해야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당시 사회와 자신의 늙어 감을 주제로 150여 곡을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829년에 로시니가 조기 은퇴했다는 것은, 오페라가 가장 중요했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로 추앙받던 그가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작곡 자체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퇴 이후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은 1842년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1864년의 <작은 장엄미사>입니다. 로시니는 1857년부터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약 150여 편의 피아노, 성악, 실내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피아노 소품이 가장 많고 성악곡과 기악곡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로시니는 이 150여 편의 모든 작품을 <늙은이의 못된 짓>(Les Peches de vieillesse)이란 제목으로 묶었습니다. 1868년, 그러니까 그가 죽던 해에 로시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음악은 오직 관념과 감정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관념과 감정은 모두 증기와 약탈과 바리케이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1822년 내가 이탈리아에서 활동을, 그리고 1829년에 프랑스에서 내가 활동을 포기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총 14권으로 이루어진 《늙은이의 못된 짓》에는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낭만주의적인 다진 고기 요리’와 같은 음식, 그의 삶을 결정적 위기로 몰아넣었던 1830년 프랑스와 1848년 이태리 혁명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동료 작곡가들에 대한 풍자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에는 ‘즐거운 기차여행의 우스꽝스러운 묘사’도 있고, 자신의 친구 마이어베어를 소재로 한 ‘분수에 맞는 장송가, 나의 가난한 친구 마이어베어’도 있습니다. ‘내 아내에게 부리는 응석’도, ‘구체제의 견본’이나 ‘현대의 견본’과 같은 시사적인 작품도 보입니다. 그런가하면 이태리나 프랑스를 여행한 것이 한 권으로 묶였고, ‘천식 환자의 연습곡’, ‘어떤 마주르카의 잘못된 탄생’ 등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음악에 관련된 곡도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에서도 로시니는 여전히 오페라 작곡가로 사랑을 받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마니아들이 그가 쓴 <스타바트 마테르>나 <작은 장엄미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늙은이의 못된 짓>이란 제목으로 묶인 그의 말년의 소품들은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야 두말 하면 뭐하겠습니까.

 

 

 

 

사실 얼핏 들으면 대다수 《늙은이의 못된 짓》에 나오는 소품들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배경 음악으로 적합하고 여흥에 더 그럴듯합니다. 물론 로시니가 능력이나 경험이 부족해서 이런 소품들을 작곡한 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를 열광케 할 오페라를 써 달라는 유혹을 뿌리치면서 로시니는 이런 음악을 썼던 것입니다.

 

로시니는 이런 소품을 10여 년 간 작곡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저는 로시니 삶의 모토에 충실했다는 이 한 마디가 웬만한 목사의 설교 한 편보다 더 믿음이 갑니다. 물론 그 이유는 그의 76년의 삶이 이 한 문장을 보장하기 때문이고, 음악가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먹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소화시키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 부르는 희극 오페라의 네 가지 핵심 행위이다. 이 오페라를 즐기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사람은 정말 바보다.

 

‘가스통 할배’들로 인해, 그리고 노욕을 버리지 못한 정치권과 경제계와 종교계 노인들로 인해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와 피곤이 이만저만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늙음은 영광도 슬기로움도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채현국 할아버지의 등장에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아무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늙은 꼰대의 욕망에 채현국은 통렬한 펀치를 날렸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폐기해버렸던 노인의 지혜와 연륜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로시니와 채현국을 닮은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기대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할아버지를 닮고 싶은 젊은이들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떠날 때를 알고, 재산이든 재능이든 이웃과 나누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음악과 일을 상대화 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