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사회와 세월호 참사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6)

 

분노사회와 세월호 참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현대인의 삶에 별명붙이기를 즐겨하기 시작했다. ‘위기사회’, ‘단속사회’, ‘잉여사회’, ‘갈등사회’,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등. 그러다 최근엔 ‘분노사회’란 레테르까지 등장했다. 하기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에 기초한 많은 사건들이 우리 사회를 그렇게 부르기에 조금도 주저치 않게 할 정도이긴 하다. 원한 관계를 따져보기 곤란한 우발적 사고에 불특정 다수를 향한 울분의 폭력행위 등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된지도 꾀되지 않던가. 이런 점에서 젊은 작가 정지우의 《분노사회: 현대 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는 매우 시의적절한 인문적 훈수라 하겠다.

 

본디 분노란 물리적 대상에 대한 행위 주체자의 생물학적 반응이다. 즉 생존을 위협하는 안팎의 대상에 대한 행위 주체의 즉각적 감정 반응이 바로 분노이다. 따라서 적절한 분노는 행위 주체자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분노는 때론 공격적으로 거칠게 상대방을 쏘아붙이고, 압도적 대상을 만났을 때는 멀리 피하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행위 주체자의 생존과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지우는 자신의 책에서 어느 정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현대 사회에서는 물리적 분노가 ‘관념적’으로 바뀐다고 지적한다. 그는 현대인의 분노는 생존과 본능이라는 원초적 차원에 멈춰있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현대인은 공동체의 규약을 지켜내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다양한 문화적 자극과 영향 아래 형성된 ‘특정한 기준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현대인의 분노란 바로 그러한 기준이 깨어지거나 어긋날 때 발생한다. 그래서 평소 사람들이 옳다고 여겼던 생각이나 이념, 그리고 신조나 관습이 뒤틀어지면 분노의 감정을 발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갈음하자. 지금 내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현대인의 분노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한국사회의 분노라는 에너지가 작동하는 방식에 더 눈길이 가고 있다. 분노의 사전적 뜻은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는 상태’이다. 분노는 인간이 낼 수 있는 힘 가운데 매우 크다. 따라서 분노가 모이면 사회적 에너지는 움직이게 되고, 결국 그것은 적지 않은 변화의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내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 우리 사회의 분노 에너지가 보이고 있는 ‘분산적’ 성격이다. 우리의 분노 에너지는 응집된 힘으로 사회의 구체적 변화로 결말을 보지 못하고 흩어져버리는 특징을 종종 보인다. 왜 그럴까? 분노가 적절히 작동하여 사회의 긍정적 에너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가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를 향하던 페리호가 진도부근 해안인 맹골수도에서 침몰했다. 여전히 선실에는 구조를 기다리던 많은 생명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476명의 승객 중 무려 304명이나 사망하거나 실종에 이르는 대 참사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TV 수상기를 통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곤 사람들은 분노했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였나!’라는 한탄에서부터 인명 구조에 미온적(?)이었다고 의심받는 공적 기관들에 대한 질타에, 행정 당국자들에 대한 원성까지. 게다가 희생자 대부분이 이제 막 꽃을 피워야 할 10대 후반의 어린 고등학생이었기에 참사 후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리고 1년이 지나도록 분노는 단발적으로 제기될 뿐.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적절하게 작동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때그때 물 끓듯 타오른 적은 있지만 결국 이 사회의 구조적 병폐나 문제를 치유하는 길로는 달려가지 못했다. 여전히 분노는 개인적 차원에서만 휴화산처럼 분산될 뿐 제대로 이 사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에는 내달리지 못했다. 왜 그런가? 여전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난 그 이유를 우리 사회가 가지는 왕조적 특징 때문이라고 본다.

 

불행히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주적 시스템을 쟁취하지 못했다. 수천 년 동안 임금을 모시던 관습에서 순식간에 외부의 간섭에 의해 공화제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 개인의 마인드와 사회의 에토스는 왕조 시절의 때를 벗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러다보니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안착시켰지만, 민주주의라는 에토스는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어정쩡한 불균형의 상태가 이 땅을 여전히 왕조의 동토에 머물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된다. 그러니 5년제 비정규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은 제왕적 군주가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의 임명을 받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공복이 아니라 지배자의 내음을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심정적 정황 가운데 정작 주권자요 납세자인 시민은 계몽적 군주만 손꼽아 기다리는 왕조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플라톤이 꿈꿨던 철인왕을 기대하기에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너무 허술하고 모자라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상적 계몽군주 지도자를 기대하기도 매우 곤란하다.

 

이런 상황이니 사회적 분노가 제대로 작동할만한 기제를 기대하기 곤란하다. 현대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역사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니 사회적 분노를 적절히 제어하고 발휘할만한 훈련 또한 우리에겐 매우 부족하다.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왕조를 제 손으로 끝내지 못한 민족이 갖게 되는 한이런가. 그나마 왕을 백성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었던 최적의 기회였던 4.19혁명을 이승만의 망명행위로 날려버린 이후에 우리는 여전히 계몽의 강을 건너지 못한 왕조사회의 신민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몸은 21세기의 현대 국가에 의탁해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마인드는 왕조시대의 미망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 우리의 왕조 마인드 탈출은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4.16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사회적 분노를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왕조적 마인드 탈출의 가능성을 확인케 해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할 것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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