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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

어떤 바람

by 한종호 2015. 4. 9.

홍순관의 노래 신학(15)

 

어떤 바람

호시노 도미히로 시 / 한경수 곡

- 1993년 만듦, ‘신의 정원’ 음반수록 -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 바람이

꽃에 불면 꽃바람 되고요.

음~ 바람은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시대의 죄가 사무칩니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차마 떳떳이 볼 수가 없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동그란 눈을 뜬 아가의 눈을 차마 또렷이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그 일들을 마주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 한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죽음의 나이를 센다든지,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깊은 관심과 세심한 살핌 없이는 어렵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폭풍처럼 지나갑니다. 어제를 지나 오늘, 오늘을 건너 내일. 그냥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오늘이 아니라 백년을 걸어온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사는 인류는 ‘발전’이라는 명분과 ‘현대화’라는 무기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기술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부를 향해 욕망의 담을 넘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것은 탁한 공기, 썩은 물, 마른 땅, 사라지는 꽃, 갈라진 대지, 시드는 지구의 얼굴입니다.

 

이런 모순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인간이 만든 ‘모든 문명’에서 비롯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늘도 밤낮을 모르며 집을 짓고, 산을 없애고, 도로를 닦고, 강을 막고,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시대의 바람’이 지나갑니다. 각자의 인생에 ‘시간의 바람’이 불어갑니다. 이 시대는 제 숨을 쉬고 있는 걸까요. 꽃에 바람 불어도 그 향기 없고, 들판에 무명초는 춤추지 않습니다. 아침에 불어도 시작은 없고, 저녁에 불어도 쉼은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바람은 ‘다른 바람’이 됩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이 시대를 지나가는 바람은 분명,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다른 바람’이 됩니다.

 

어이없는 죽음들이 우리 앞으로 매일 밀려옵니다. 수백 가지 이유를 들먹이고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고 밤을 새워 토론하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모두 ‘자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돈’이지요.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속절없는 세월 앞에 돈으로 버티고 저항하고 누리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진리도 경전도 윤리도 ‘돈’과 ‘누리는 이익’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형언이 어려운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생색을 내려는 눈동자들은 밤에 짐승처럼 빛납니다. 자본의 제국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안간힘을 쓰는 선한 싸움 속에서도 그 음흉한 얼굴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자본의 바다에서 호사를 누리는 자들보다도 그것을 상품으로 삼아 다시 제 뱃속을 채우는 소위 바리세인, 율법주의자들(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에겐 더욱 숨이 막힙니다.

 

거대하고 막막한 괴물인 자본주의 앞에 서서, 그 끝없는 욕심과 폭력을 매일 대하며 한심한 무력감으로 비현실 같은 현실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묘수를 아직 찾지 못합니다.

 

오마르 카이얌의 허무에 사무친 ‘루바이야트’를 되뇝니다.

 

“아, 인생 기록을 다시 고쳐지었으면,

쓰여진 기록을 송두리째 지웠으면

이 마음에 꼭 들도록 다시 고쳐지었으면….”

 

창조 이후 세상을 다시 고쳐 쓸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내 인생 정도만이라도, 그도 아니면 한 삼십년쯤만이라도 다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허무맹랑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잘못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절절한 고백이요, ‘돌아봄’입니다. 이만치 와 있는 세상을 보며 멈칫합니다. 이 세상 달리는 모든 것들에게 멈추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답대신 마른 모래바람만 일고 지나갑니다. 정치도, 경제도, 예술도, 종교도 계속 걷고 싶다면 지금은 멈춰야합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다시 바라봅니다. 일제강점기는 친일의 바람으로, 전쟁은 분단의 바람으로, 독재는 기득권의 바람으로, 이 모두는 또 한데 어울려 자본주의의 바람으로 불어옵니다.

 

그러나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추하고 나쁜 것들을 다 들이마시고 선하고 좋은 것으로 뿜어내주는 나무들이 있어섭니다. 그래서 숲은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숲은 다름 아닌 예수입니다. 사람으로 오시며 고독의 바람으로, 빈들을 걸으시며 침묵의 바람으로, 빈자들에게 위로의 바람으로, 돌무덤에서 부활의 바람으로 일어나신 예수.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시여! 있는 듯 없는 듯 바람 같은 나의 님이시여!

 

이 부박한 시대를 건너가는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될까요? 역사와 시대의 쭉정이는 나중에 압니다. 오래 걸리지만 확연히 드러납니다. 연민과 진심으로 흐르는 눈물의 코드나 리듬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눈물이 이 시대를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일 할 밖에요, 농부처럼 입 다물고 허리 굽혀 일 할 밖에요.

 

아,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요?

 

덤,

 

‘어떤 바람’은 일본의 시인 호시노 도미히로가 쓴 시입니다. 그는 체육교사를 하다가 철봉에서 떨어져 평생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워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고통을 딛고 창작을 시작합니다. 입에 펜을 물어 쓴 시는 마음을 울렸고, 붓으로 그린 그림은 그 아름다움이 남다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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